적당히 먹고 적당히 살다 적당히 죽으면 된다는 가치관은 이제 사라져 가고 있다.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을 보면
은유적으로
말과 교감한 후 조현병이 걸린 니체를 뒤로 하고
영원 회귀처럼 똑같은 일상을 지속하는
부녀를 비춘다. 무려 2시간여 동안.
물질적 구현에서 적당한 것을 이상으로 삼으면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한다.
그제야 정신적, 영적 삶에서 무언가를 구하게 된다.
우리의 감각 기관이 그렇다.
관념이 인도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현상계를 헤매게 되어있다. 자극 대 반응은 자동 반사이자 쾌락을 생성한다.
아들이 한두 핸가 전에 농담처럼 그랬다.
“만수르는 좋겠다” “나도 만수르처럼 되고 싶다.”
한번도 그런 곳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당황했지만 꼰대는 될 수 없어
되고 싶으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가치라는 것이 모두 계량화가 되고
그래서 비교가 바로 되고
그래서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탐험이라든가
모험이라든가
투신같은
무용하고
축적할 수 없는 행위들은
-인간이 그토록 원하는데도-
전시되고
방송되는
이벤트가 아니라면
사적으로도 잘 허용되지 않고 있다.
세상은 오히려 더 경직되었다.
영원 회귀에서
부녀를 짐싸서 떠나게 한 것은 타자들이었다.
불온한 타자. 타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위협적인.
우리의 영혼은 의식과 루틴에 몸이 꽁꽁 묶여있을 때 오히려 투명해지고 비상한다.
나도 매일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별다를 것 없는 감자를 찐다.
어쩌면 나라는 사건을 축약하면
이것이 주요 사건일 것이고
다른 것은 나비 효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