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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재비 Jan 04. 2020

[월기장] 2019년 10월, 11월, 12월의 월기

이쯤 되면 월기 아니고  분기기라니까..

누구나 혼자 가을로 간다
누구나 혼자 조용히 물든다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대 인생의 가을도 그러하리라
몸을 지나가는 오후의 햇살에도
파르르 떨리는 마음
저녁이 오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저 노란 잎의 황홀한 적막을 보라
은행나무도
우리도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노란 잎 - 도종환



겨울이 정점에 다달랐을 때, 가을을 떠올린다. 무언가 생그럽게 익고 익다 그 에너지를 견디지 못해 조금씩 물러지는 계절과 최소한을 남겨 놓을 준비를 해야 하는 그 계절을...


내가 가을을 미워하게 되다니


평생에 걸쳐 나는 가을을 가장 사랑했다. 선선한 바람이 뺨을 간지럽히는 초 가을의 날씨는, 내가 늘 입에 달고 사는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노상에서 맥주 까기 좋은 날씨, ' '회사 째야 되는 날씨'였다.  날씨에 대한 여러 묘사 중에 단연 최상급이라고 할 수 있지. 크고 작은 낙엽이 부지런히 떨어져 길가에 소복이 쌓여있는 모습도 참 좋아하고,  이른 가을 아침, 낙엽 위 축축하게 맺혀 있던 이슬들이 발끝을 적시는 기분도 좋아했다. 하루를 마친 후 가로등이 비추는 낙엽 쌓인 골목길을 혼자 걸어가는 일은 또 얼마나 낭만적인지.


가을의 풍경과 공기는 여전히 사랑스럽다. 하지만 이제는 가을을 살짝 무서워하는 버릇이 생겼다. 직장인에게 가을은, 한 해 투입했던 노동력의 결실을 증명해야 하는 자비 없는 시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조금 있으면 실적 정리도 해야 하고, 내년 상반기 경영 계획이나 기획서도 내야 하고... 연봉에 대한 고민도 스멀스멀 올라올 것이다. 한 편,  2말 3초 여성으로서, 나에게 가을은, 이별의 상처들이 무심하게 툭툭 떨어져서 쌓이는 스산한 계절을 의미하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 이 시기는, 책장에 달려가 여름 내내 먼지 품고 조용히 쉬고 있던 오스카 와일드의 '심연으로부터'를 꺼내고, 아름다운 듯 찌질하기 짝이 없는 문장들을 곱씹으면서 눈물즙을 짜내는 청승을 반복해 왔다.


아. 내가 가을을 미워하게 되다니. 혹시 이 가을이 지나고 한 살 더 먹는 게 싫어서 그러나? 이게 다 나이 먹는 것 때문일까? 정말로?


삼땡, 글로벌 나이 32세가 되다


제 아무리 내 에너지가 날뛰어도,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멈출 수는 없는 법. 나는 예정대로 10월 2일에 한 살 더 먹게 되었다. 작년에 내 인생 최초의 요란한 생일 파티를 기획하면서, 다음 생일 파티는 '환갑'이라며 호언장담 했지만, 막상 생일이 다가오니 작년의 짜릿한 재미가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몽땅 불러서 한 잔 같이 꺾고 싶은 마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을비가 공기를 씻어주던 날, 오랫동안 알아왔거나 앞으로 오랫동안 알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마라샹궈에 50도짜리 중국술을 마시고 악뮤의 노래를 숨죽여 들었다. 그렇게 사랑스럽게 2019년의 마지막 분기가 시작되었다. 




2019년 10월, 오춘기를 맞이하다


하지만 그 사랑스러웠던 시작과 다르게, 2019년은 유난히 가을이 을씨년스럽다고 느껴졌다. 올 해는 가을에 무심히 떨어지는 상처도 없었는데. 왠 걸 괜히 우울한 거다. 일도 웬만큼 잘 해내고 있었고, 사실 지난 몇 달간은 더 원할 게 없어서 갖지 못한 것도 없고, 불안과 걱정도 없는 열반과 해탈의 경지에 올라가 있었다. 적어도 2019년의 70% 정도는 삼땡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런데 문득, 시원한 바람이 한 줄기 불자마자, 일만 하고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다는, 내 인생은 어디서 표류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내 일상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혼자 있을 때는 적적하다고 느끼고, 모두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는 강렬히 혼자 있고 싶은 열망에 쌓였다. 굴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은 거다. 하지만 직업 특성상, 난 혼자 있을 수가 없다! 혼자 있기는커녕, 인생에 절반 정도는 길 가에 전시하는 수준이 아닌가?


어깨빵이 일상이던 강남에서의 5년 일상을 잠시 옆으로 밀어 두고, 서울숲으로 왔다 갔다 한 것도 컸다. 아무리 걸어도 누군가 날 붙잡고 전단지를 건네지 않는 곳. 10분은 걸어야 지하철을 타러 갈 수 있고, 지하철 역 옆에서는 숲을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 있어서 늘 바쁘게 살지 말고 그리로 오라고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2019년 11월, 일이 많으니까 오춘기고 뭐고 다 잊었다


인간이란 참 단순했다.  다시 슬슬 일이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 감정은 사치였던 걸까? 해결 방법은 정말 심플했다. 그냥 일이 많아지고, 잉여 시간이 부족하니까. 또다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 야 내 생각 돌려줘. 


아니, 사실은 그냥 이 계절은 이렇게 지나가는 거다


거창하게 내 감정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해결책을 정리해서 제안할 것도 없이. 사실 그냥 이 계절은 이렇게 지나가는 게 맞다. 모든 계절이 맑은 하늘에, 좋은 공기에, 지중해에서나 불법한 바람이 불어올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함께 여서 좋을 때가 있고 또 혼자여서 좋을 때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꼭 필요한 시간은 '혼자서 외로운 시간'이다. 누구나 혼자서 그냥 그렇게 보내야 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루는 더디고, 뒤돌아보면 훅 하고 빠르게 지나가 버린다는 거.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고민은, 말하지 않고 그렇게 넘겨야 한다. 나는 늘 방법은 알고 있었다. 


12월, 술에 취하지 않고도 시간을 낭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TV 드라마도 많이 안 보고, 게임도 안 하고, 요즘은 운동도 못하고 있던 나에게, 유일한 삶의 낙은 술이었다. 혼자서 늦은 밤에 야식 꺼내서 맥주 한 캔 하는 것도 너무 좋고, 걸쭉한 안주가 나오는 맛집에서 정신 잃도록 소주 마시는 것도 좋고, 사운드가 빵빵한 곳에서 데낄라를 들이붓는 것도 너무 좋고, 바텐더가 추천해 주는 칵테일을 골라 마시는 것도 좋고, 미식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와인을 찾아 마시는 것도 좋다. 이 많은 일들과 몰아치는 스트레스가 맛깔나는 한 잔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술이란 건 황홀한 것이다.


술에 취한 나는 극도로 나태하고 비효율적이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엄청나게 걸쭉한 농담을 아무한테나 툭툭 던지고, 모르는 사람한테 가서 인사하고 말도 걸고 떡볶이도 얻어먹는단다. 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건 아닌데, 그냥 술을 먹으면 옆에 있는 사람이 다 절친 같아 보인다. 아무 얘기나 신나게 잘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행복한 기억만 남아 있는데. 술을 마시지 않은 내 자신은 극도의 효율을 추구하고 얻을 게 없는 사람에게는 말도 잘 걸지 않는 사람에다가 자기 분석은 시도 때도 하고, 남들의 감정까지 분석한 다음에 움직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니. 참 그 점이 아이러니하다.


연말 술 모임 최강자로 올해도 살아남을 수 있어 다행이다. 한잔 더, 죽어보라고 건네는 술도 애교로 받아줄 수 있다. 하지만, 술 말고도 다른 소소한 낭비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날씨 이야기나 소소한 인사말들. 요즘 넷플릭스에 뭐가 재미있어?  자기 전엔 뭐해? 유튜브는 주로 어떤 걸 봐? 퇴근할 때는 지하철 타? 이런 목적 없는 대화들 속에서 목적과 의도를 찾는 나 자신을 보며. 


기억의 상실


회고하려 보니, 많은 일들이 기억나진 않는다. 성과가 많은 한 해였지만,  결과만 기록해 스스로 시상식을 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올 연말은 일이 너무 바빠서 낮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정말 거의 대부분이 기억에 남지 않았다. 무엇이 회사 일이고, 무엇이 나를 위한 일이고,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커뮤니티 행사에는 겨우 뜬 눈으로 나가서 자리를 지키고 돌아왔고, 집에 오면 10시가 넘어갔다.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일을 하고 들어오기도 하고, 일을 하러 나갔다가 사람들과 교류하고 오기도 했지만, 뭐 여하튼 소소한 일이나 대화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크리스마스가 빨간 날이라 정말 다행이다. 


99%


12월 말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일을 하다가 오래간만에 시계를 보았다. 오후 3시였다. 그 시간에 일을 하다가 시계를 볼 여유가 있었던 게 언제였던지 기억이 안 났다. 달력을 보니 12월 17일이었다. 마라톤을 하거나 크로스핏 같은 격렬한 운동을 마치고 나면, 정신이 산화되어 버리고 그냥 내가 여기서 쉬고 있고,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땀이 식는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데, 강남의 어느 건물 사무실에서 바로 그 느낌을 느끼고 있었다. 육체는 물컹물컹한데 뇌 속을 마구 휘젓던 생각들이 뜨끈뜨끈해졌던 거다. 


축복인 건. 한 해 이루고자 했던 것은 99%를 이뤘다. 목표에 세웠던 것을 하나도 이루지 못했던 것이 없고, 목표에 세우지 않았던 것이 저절로 이뤄진 것도 없었다. 1%를 깎은 건, 의식이 없는 와중에 지갑이며 휴대폰이며 가방을 순서대로 잃어버렸던 것 때문이다. 이제 내 한계를 알겠다. 지갑을 잃어버리면, 거기서 멈추고 숨을 고르는 거다. 


-


다음 분기는, 아니 다음 달은 일을 좀 적게 해 보기로 다짐한다. 

목적 없는 대화와 시간을 많이 가져보기로 한다. 

차라리 좀 더 맹렬히 가을을 미워할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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