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가 맛없는날이 있겠느냐만은, 맥주가 유난히 시원하게 느껴지는 저녁이 있다.
에어컨이 닿지 않는 자리,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밀려들어오는 업무 범위 내외의 업무들, 말풍선이 쌓이는 만큼 늘어가는 스트레스까지.
지금 이 순간 사무실에서 1초도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기분은, 온 몸의 장기들이 맥주를 원한다는 강력한 시그널이다.
"설거지하는 김에 내 컵도 같이 좀 해줘, 부탁할게 응?"
점심시간이 갓 지났지만 알 수 있다.
오늘은 퇴근 후 맥주 약속을 잡지 않는다면 지구가 터지거나, 한강이 마른다거나, 내가 최대리의 머리를 머그컵으로 세게 내리치는 것 중 뭐 하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 같은 날이다. 대한민국에는 반말법이 시급하다.
반말법이란 무엇인가.
회사에서 친구처럼 반말할 거면 월급도 친구처럼 엔빵으로 나눠 가지는 법이다. 물론 반말법보다는 치킨 반 마리가 심리적으로 우리에게 가까우므로 이 법이 제정될 일은 없겠다.
시답잖은 생각들을 하다 보니 머리끝까지 올랐던 열이 식...기는커녕 최대리의 머그컵에서 웃고 있는 사자 모양의 캐릭터까지 밉다.
여섯 시 땡하자마자 퇴근해야지, 단골 술집에 도착하면 가장 안쪽 자리에 구겨져 앉아야지, 메뉴판을 볼 것도 없이 중화닭튀김부터 주문하고 기본안주가 테이블에 닿기도 전에 칭타오를 원샷해야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급 행복회로를 돌린다.
내 안의 화는 시원한 맥주가 아니고서는 식힐 수 없다. 열받은 날은 맥주로 화를 식혀주어야 한다는 사실. 이것은 지구상 변하지 않을 마지막 진리다.
오늘은 병맥주 먹는 금요일, 병먹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