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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Mar 22. 2020

무취(無臭)

   코 끝을 간지럽히는 잔향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간다.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또각 거리는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여인. 보이는 것은 뒤태뿐이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다. 그녀와는 초면이고, 그녀가 뿌린 향수와는 구면이다.


ㅡ랑방 에끌라 드 아르페쥬.

그 날, 어떤 향수냐는 내 물음에 정하는 그렇게 답했다. 끔찍하리만큼 길고 어려운 이름이라는 내 투정에 '랑방의 딸에 대한 무구한 사랑'이라는 뜻까지 해석해주면서.

ㅡ좋아하는 향수 있어?

ㅡ아니, 나는 향수 안 써.

조금 놀란 듯 정하의 동공이 커졌다. 곧 이유를 묻고 싶은 듯 입가를 오물거리다가, 덜컥 나의 팔을 집어 들고는 코를 들이민다. 그녀는 항상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ㅡ어때? 무슨 냄새나?

정하는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ㅡ그냥 옷 향기?

ㅡ다행이다.

ㅡ왜? 냄새날까 봐?

ㅡ아니, 아무 냄새 안나는 게 좋거든.

정하의 눈동자가 연달아 깜빡였다. 초점을 잃은 나의 것과 비교했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역동적이었다. 주로 반짝였고, 때때로 일렁였으며 이따금은 세차게 흔들리곤 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를 익사시키는 그 눈동자는 지금 돌이켜보면 바다를 닮았던 것 같다.

ㅡ왜?

ㅡ으음... 조금 철학적인 이야기인데......

곤란한 듯 질질 끄는 나의 말에 정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ㅡ나 그런 개똥철학 좋아해.

비슷한 상황이 오면 나는 항상 그럴 생각 없음에도 망설이는 척을 하곤 했다. 그 바다를 품은 눈동자가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대놓고 바라보고 싶어서.

ㅡ클리셰 같은 이야기 있잖아? 향수 냄새에 누군가를 떠올리는 그런 이야기. 어느 날 문득 진지하게 고민해 봤는데, 별로더라고.

ㅡ어떤 게?

ㅡ그냥... 특정한 향수에 떠올려진다는 게 마음에 안 들더라고.

ㅡ그러면?

ㅡ나는 욕심이 많거든. 내가 누군가에게 떠올려진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특정한 상황이 아니라 항상 떠오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더라고? 근데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향수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ㅡ그렇지.

ㅡ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많은? 흔한? 냄새가 무엇일지 고민을 해보았지.

그즈음에서 정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올리고 어린아이를 보채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ㅡ그래서 향수를 안 뿌리는 거야?

ㅡ지금 허공에 킁킁거려봐. 어떤 냄새가 나?

정하는 몇 차례 허공에 킁킁거리고는 답했다.

ㅡ아무 향기도 안나.

ㅡ사람의 후각신경은 신경계 중에서도 가장 빨리 피로해지는 곳이거든. 그래서 어떤 냄새든 금세 적응하게 되어서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려.

정하는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ㅡ그러니까 무취야 말로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냄새인 거지. 그래서 누군가 냄새로 떠올린다면 나는 무취가 되고 싶었어. 언제, 어디서나 떠오르는 그런 사람.


   아쉽게도 나는 그 개똥철학이 드러 맞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나간 이에게 무취 속에서 나를 떠올리느냐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글쎄, 과연 그런 종류의 이별이 존재하기는 할까.

   사실 실패한 이론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다.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떠올리기엔 추억이라는 것도 제법 빠르게 피로해지는 곳이니까.

   어디에나 있다는 것들이 가지는 공통점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가령 박테리아, 수소와 같이 그 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인지의 범주에서 배제되는 것처럼 말이다. 있겠거니 하고 넘어가게 되는 그런 것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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