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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명희 Nov 13. 2022

알 길 없는 패트릭

패트릭한테 연락했다. 연락 안 한 지 한 6-7년 되었을까? 왠지 이제와 멋쩍어 안할랬는데, 결국 생각나는 사람은 패트릭이었다.


패트릭은 15년 전쯤 진영 샘이 소개해준 영어 에디팅 자원활동가였다. 한국에 살면서 유명 학습지 회사 영어 편집을 주로 하면서 홍대에서 아마추어 베이스 연주를 하는 사람이었다. 살고 있는 나라에서 무언가 기여할 것 을 찾아 자원활동을 찾고 있었다. 나는 패트릭과 스타벅스 서교점에서 처음 만났던가. (스타벅스 전 같은자리 달팽이 그림이 붙은 카페였는지도 모르겠다.) 간단히 할 수 있는 일과 필요한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헤어진 기억이다. 자원활동으로 다른 자원활동가가 한영 번역한 영문서의 최종 교열과 편집을 해주기로 했다.


교정교열을 요청하면 패트릭은 그냥 고친 것은 빨간색, 이해가 가지 않아 제대로 못 고치겠는 것은 파란색으로 하이라이트 해서 보내왔다. 자원활동가들이 한영 번역한 것들에는 파란색 이해 못 할 영어로 된 문장이 꽤 있었다. 나라고 그 문장을 제대로 쓸 수 있는 능력은 없었으나, 그 문장을 되는대로 쉬운 말로 설명하는 메모를 붙여 패트릭에게 다시 보냈다. 그러면 패트릭은 다시 이해한 대로 문장을 바꿔서 보내주는 식이었다. 한참 회사(사회적 목적을 위해 운영하는 조직, 비영리)에서 국제교류를 시작하던 때라 국제 행사도 많이 했었고, 영어로 뉴스레터도 발행하고, 홈페이지 만드는 일에 열을 올렸던 시절이었다. 때때로 발행하는 영문 연간 보고서도 패트릭의 교정교열을 거쳤다. 조직의 모든 영어 소개 자료를 처음 만드는 시기였는데, 사회적 활동을 하는 우리 회사에 영문 교열에 제대로 돈들이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참 많은 일을 부탁했었다.


여러 활동가 풀(pool)을 두고 일했지만, 일하는 스타일이 맞고 교정, 교열해준 글 스타일이 좋아 거의 일 순위로 일을 패트릭에게 부탁했다. 다양한 활동가에게 번갈아 요청해 본 적도 있으나, 다른 활동가들은 작업 시간을 너무 길게 잡거나, 안될 때가 많았다. 또 오래가지 않아 그만두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자원활동가에게 표 안 나게 손 많이 가는 이 일이 어려 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뢰하는 입장에서도 아무리 비용이 안 든다지만 기본적인 오리엔테이션에 품이 들고, 일로 하는 것이니 너무 느리지 않은 타이밍에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패트릭에게 염치없이 다른 사람 재끼고 점점 더 익스클루시브하게 부탁하기 시작했다. 많은 일이 자원 활동하는 그에게 갔기에, 의뢰하는 나도 무조건 기대고 싶은 마음을 접고, 안 괜찮으면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 거니까 얘기 주라고 몇 번은 이야기했던 기억이다. 그러나 패트릭은 늘 무리하는 기색 없이 할 만큼만 한다는 투였다. 언제나 “흠… 언제까지는 가능해.” 라는 간단한 답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타임라인이 좀 길어지는 것 빼곤 패트릭이 진짜 안된다고 한 적은 몇 번 없었다. 언젠가 이렇게 활동하는 거 괜찮냐? 는 내 물음에 사회에 기여하는 일로 내가 하기로 했고, 여력이 되면 한다고 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쌓이고 보니 그게 대단한 양이었다. 우리 회사의 역사와 사회적기업의 국가별 트렌드 업종별 사회적기업 이슈 문서들이 패트릭을 통해 괜찮은 영어로 새로 태어났다. 그때 패트릭이 국제 콘퍼런스에 우리 조직 대표로 초대되었대도 우리 조직 소개와 한국 사회적기업 현황을 패트릭이 소개할 수도 있었을 거다. 아마 진심으로 그 글들을 소화했다면 패트릭은 사회적기업 전문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진득이 꽤 많은 일을 했기에 고마움에 밥도 사고 싶고, 가끔 만나서 (도망가지 않도록)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싶었는데 패트릭은 늘 자기가 할 만큼 일하고 공치사를 하지 않았다.  물어보면 이야기해주긴 하는 데,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는 스타일도 아니어서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중간에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가 있었다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거의 십 년 활동한 기간 동안 내가 아는 것은 그가 소설책을 낸 적이 있다는 것, 그림도 그렸다는 것, 항공사 잡지 같은 것 교열할 땐 돈을 많이 받는다는 것 정도.

일 년에 한두 번쯤 자원활동가 관리하면서 만나긴 했지만, “고마워. 앞으로도 활동 잘 부탁해”란 말과 함께 1인당 만원 안팎의 간단한 식사와 차 이상 한 적이 있었던가. 없다.


그래도 나는 알았다. 패트릭은 그저 웬만하면 돕고, 하기로 한 일은 성의껏 하는 사람이란 것. 패트릭은 안 친해도-같이 시시콜콜 알고, 정겨운 이야기 안 해도- 도울 수 있으면 돕는다는 것. 관계를 저울질해 예스/노를 결정하지 않으니 나도 기본을 지켜 필요한 것 이야기해도 된다는 것.


그 이후, 초창기와 달리 회사에서는 이래저래 예전처럼 영문 작업을 하지 않게 되었고, 나도 몇 년 전엔 그 회사를 나왔다. 그 이후도 몇 번 영문 에딧 할 일이 있었으나 연락 않다가 문득 몇 년 만에 패트릭에게 연락해서 부탁하기가 좀 그래서 가능하면 에둘러 갔고, 돈 내고 다른 사람을 찾았다.


그러다가 요새 내 글 한 꼭지 영문에디터가 필요해 전전하다가 막판에 멋쩍게 패트릭에게 연락하게 되었다. 추상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복잡한 글이어서, 누군가는 읽기 귀찮을 글이고 비용도 많지 않았다. 시일도 짧고 양도 꽤 되어 이미 에딧은 반쯤 포기하고, 글 에딧은 안 해줘도 패트릭에게 이참에 연락해 봐야겠다 싶어 생각난 김에 예전 이메일로 연락해 봤다.


한국에 계속 있는지 나보다 한 열 살은 많았던 것 같은데 살아는 있는지 생각해 보니 궁금했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법한 핫한 이메일 계정으로 메일을 보냈다.  


한 시간쯤 뒤에 온 패트릭의 회신.  언제나 그랬듯 몇 줄 안 되는 글에 마음이 담겨있다.


“몇 달 전에 서울에 있다  A건물 (예전 회사) 지나는 데 문득 요즘 마리는 어디에 있지 생각했어. 이제 알았네. 하루 이틀 안에 보낼게. 넌 좋은 사람이니까 에딧 값도 디스카운트 야.00만 내.”

(에딧 가능하다면 이번엔 나도 돈 받고 일하니, 에딧에도 돈을 내겠다고 먼저 제시한 내 비용에 25% 할인한 금액을 적어 보냈다. 그리고는 외국계좌 수수료가 높다며 한국에 1월에 가니 그때 줘도 된다고 했다. 그 김에 얼굴 볼 핑계도 생겼네 하며 )


패트릭에게 하고 싶은 많은 질문이 퐁퐁퐁 올라왔다. 서울  지방에 있는 건지, 외국에  건지, 요즘은 뭐하며 지내는지, 얼굴은 얼마나  늙었는지, 릴레이션쉽에 달라진 것은 없는지. 난 왜 늘 사람 개인사 이런게 궁금할까? 회신으로 수많은 질문을 하기엔 그렇다. 마음속으로 다음 한국에   물어보기로 하자 다짐했다. 문득, 패트릭이 sns 한다면 이런  내가  꿰고 있을 텐데.  패트릭은  sns  해가지고.  너무 답답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하긴 패트릭이 sns  사람이 아니지. 흐흐. 그래. 그래도  패트릭이 좋아. 하면서 혼자 생각을 접었다.


SNS로 이런저런 개인사 다 알아도 정작 개인적인 인사 한마디 걸기 어렵고, 건다 해도 성의 있는 답이 없는 disconnect 되어 있는 사람이 수두룩인 세상이다. 그러면서도 sns를 안 하면 잊혀질 수도 있고, 닿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생긴다.


그러나 sns 없이도, sos를 하면, 어디에 있든, 얼마나 오랜 시간 후든 그저 반갑게 답 주고 분명 번거로울 텐데도 할 수 있는 일을 마음 내 해주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게 패트릭.


그런 사람은 잊혀지지 않는다. 매일의 포스팅 없이도 이렇게 서로 기억하고 있으니, 우린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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