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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Apr 23. 2024

돌아갈 곳이 있어 다행이야

봉쥬르: PAGE 6- 7

서점에서 책을 샀을 때 내지에 끼워주는 빳빳한 질감의 종이 홍보물, 잡화점에서 산 캔디를 담았던 종이봉투, 각종 영수증과 입장권, 승차권, 공공 게시판에 무료 나눔용으로 진열해 놓은 캠페인 엽서, 광고지, 성당 입구에 비치된 기도문, 어느 예술가의 작품 홍보물...


한국에선 굳이 모으지 않았을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가 한 데 붙였어. 모두 독일에서 가져온 것들이야. 주인장 특성상, 독일에 관한 스크랩 자료는 차고 넘쳐. 내 밑에 있는 동생, 넘버 투 "감자"에 따로 정리될 정도지. 그런데도 내 안에 독일의 조각들이 이렇게 몇몇 담겨 있어. 말했잖아. 체계적이지 않게, 손에 집히는 대로, 추억상자에서 불쑥 꺼내 든 것들을 이리저리 붙이는 작업이기에 가능한 연출이라고. 즉흥성이 보장될 때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잖아. 그 재미를 놓칠 수 없지.


모아 놓고 보니 알록달록하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보도 참 많고, 하나하나 세심하게도 만들어진 물건들 뿐이야. 한국에서 찾아보지 못하는 물건들도 아닌데, 어째서 (한국에서처럼) 버리지 않고 이렇게 따로 지면을 할애해서 붙여둔 걸까.


늘 보는 건데.

차고 넘치는 건데.

흔한 건데.

비싸지도 않은데.

필요한 것도 아닌데.

어차피 버릴 건데.


뭘.

이런 마음이었겠지.


내일도, 다음번에도 '그러겠지, ' 

하는 으레 짐작 때문이었겠지. 


오늘 누렸던 것들 - 배고픔을 달래는 음식, 잠옷차림의 나를 포근히 받아 주던 침대, 나를 피곤하게 했던 순간들과 나를 피로에서 벗어나게 했던 순간들 - 이 반복될 거란 믿음 때문이었겠지.



적고 보니 상당히 교만하다. 누군가에겐 한국이 여행지가 되고, 한국의 물건들, 그러니까 - 서점에서 책을 샀을 때 내지에 끼워주는 빳빳한 질감의 종이 홍보물, 잡화점에서 산 캔디를 담아줬던 종이봉투, 각종 영수증과 입장권, 승차권, 공공 게시판에 무료 나눔용으로 진열해 놓은 캠페인 엽서와 제품 광고지, 성당 입구에 비치된 기도문, 어느 예술가의 작품 홍보물 -이 모두 새롭고, 정보 투성이고, 재미있어 보일 텐데.


여행지에서 얻은 것들이라고 작고 얇고 빳빳한 종이 조각 하나 쉽게 버리지 않다니. 여행 중의 주인장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외국어로 도배된 것이라면 그게 종이 조각이라 한들 그저 좋았던 걸까?


스크랩북의 맏이로서 나는 동생들보다 주인장에게 질문할 기회가 많았어. 가장 먼저 태어나기도 했고, 동생들의 의견까지 싹 다 모아서 주인장에게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거든. 어째서 여행 중에 모은 것들만 이렇게 공들여 붙여 놓는지 물어보았지. 그랬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오더라.


"집과 일상. 돌아갈 곳을 감사히 받아들이기 위해서야."


집이라 부르는 곳을 떠나 밖에 나갔을 때, 다른 게 먼저 눈에 들어오더래. '이국적이다. 신기하다. 재미있다.' 하다 보니 무엇이 다른 건지 계속해서 질문하게 되더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내내 (스크랩북의 재료가 되는) 자료 수집을 계속했대. 종이봉투에 얼마나 진한 원색을 쓸 수 있는지, 이름 모를 이가 한 도시의 랜드마크나 다름없는 성당에 들어왔을 때 성당의 본래 기능인 예배를 어떻게 전달할지, 물처럼 마시는 음료에 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아마도 평생 그려갈 작품을 어떤 레이아웃으로 홍보하는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자료 수집을 멈추게 된대. 달라 보이기만 했던 것들 중에서 자신의 일상을 발견한 덕분이래. 제아무리 다르고 이국적인 물건들을 접해도 결국 돌아오는 질문은 같았대. 


'여행이 끝난 뒤에는? 내가 돌아갈 곳에서는? 내가 다시 살아갈 곳에서는?' 


여행 중 바깥으로 튀어나간 질문이 화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부메랑이었던 거야.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돌아갈 곳을 생각하게 하는. 


예를 들어, 왼쪽 상단부에 붙은 후겔두벨(Hugeldubel) 서점의 책갈피 홍보물을 보고선, '한국이었다면 책에 띠를 둘러서 방금 산 책에 관한 홍보를 좀 더 했을 텐데.' 하고. 마인츠 중앙역에 입점해 있는 잡화점 나누나나(NANU NANA)의 포장지를 보고선 '샛노란색에 붉은색이라니 맥도널드 포장지가 따로 없군. 아, 맥모닝 먹고 싶다. 조조영화라도 보면 먹을 수 있을 텐데. 요즘 극장에서 뭐 하지?' 하며 입맛을 다시고. '아빠라면 맥주 얘기보단 막걸리 얘기할 궁서체를 쓰겠지.' 하면서 비어(Bier; 맥주) 관련 홍보물을 내려놓고 아빠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쾰른 대성당에 비치된 기도문(오른쪽 페이지 좌측 하단부)을 읽으면서 최근에 간절히 기도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지. 


그러고선 여행을 계속한대. "돌아갈 곳이 있어 정말 다행이야." 하면서. 

이때 '돌아갈 곳'은 집이란 공간일 수도 있고, 일상이란 리듬일 수도 있지.


늘 보는 건데.

차고 넘치는 건데.

흔한 건데.

비싸지도 않은데.

필요한 것도 아닌데.

어차피 버릴 건데.


그래도 좋네,


하는 마음이 든대. 


여행의 이유를 돌아갈 곳에서 찾다니. 아이러니하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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