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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Apr 16. 2024

어쩌다 오늘, 그렇게 지내?

봉쥬르: PAGE 4-5 (feat. PAGE 38-39)


각 잡고 스크랩북을 만드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주인장은 좀 달라. 손에 집히는 대로, 보기에 좋은 대로 막 오리고 갖다 붙이거든. 백과사전처럼 체계를 갖춰 전시할 게 아니잖아. 그야말로 주인장 좋자고 하는 '손끝 놀이'이자 '몰입의 작업'인데 부담 없이 막 하는 거지. 


아무렇게나 만드는 스크랩북의 장점이 뭐냐고? 음, 의외의 조각들이 연결되는 수 있어. 연결고리를 따라가다 보면 주인장의 무의식을 엿볼 수도 있지. 여기 4-5쪽에 정리된 것들처럼 말이야.



뤼벤 대학교에서 기획했던 유럽학 수학여행의 공지 메일과 일정표가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네. 한국의 패키지여행 못지않게 빡빡했던 일정이었대. 2박 3일 일정인데 벨기에와 프랑스, 룩셈부르크를 넘나들었다고 하네. 주인장은 단체로 버스를 대절해서 유럽을 돌아다닌 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했어. 국경을 넘지 않는 이상, 유럽에서는 버스를 대절까지 해가면서 수학여행이나 현장학습을 계획하는 일이 흔치 않다더군? 한국에서는 버스 대절이 기본 세팅 같은 거였는데 말이야.


여담이지만, 수학여행 내내 함께 다니던 버스 기사님이 학생들에게 영화를 틀어주겠다고 했대. 다 같이 <라이온킹>을 볼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볼지 거수투표를 했다더라고(장르의 격차가 엄청나지?). 접전(?) 끝에, <라이온킹>이 가장 많은 표를 받았대. 평소에 해리포터 이야기로 외국 친구들을 쉽게 사귀었던 주인장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빛내주었던 디즈니 클래식 애니메이션이 유럽 친구들의 어린 시절에도 가득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고 하네. 버스에서 옆에 앉아 있던 독일 친구 나디야는 심바의 아빠, 무파사가 죽는 장면에서 눈을 질끈 감을 정도로 <라이온킹>에 몰입해 있었대(번이고도 장면은 너무 슬퍼서 보겠다고 했대). 


다들... 어른인 듯하지만, 알고 보면 어린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안 그래?




그런데 이 페이지에 오롯이 수학여행의 조각들만 담겨 있진 않아. 자세히 보면 벨기에 디낭트(Dinant)로 당일치기 여행을 갔을 때, 올라갔던 요새의 팸플릿(왼쪽 페이지의 연분홍색 종이)도 보이고, 연말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여행했을 때 방문했던 안네 프랑크의 집(anne frank huis)의 입장권과 홍보물도 조금 보이지(오른쪽 페이지의 상단부와 우측하단부). 이전에 소개했던 미피도 보이고.


수학여행에서 주인장은 1차 세계대전의 흔적들을 공동묘지와 박물관, 추모비 등으로 살피고, 전후 유럽의 평화를 위해 세워진 국제기구들(예를 들어, 우측 페이지에 파란색 네모 스티커로 붙어 있는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같은 곳)을 방문했어. 전쟁의 흔적과 평화를 위한 노력, 그리고 죽음을 애도하고 사람을 귀히 여기려는 마음을 보고 배웠지. 


충격이 컸대. 총을 맞고 쓰러졌을 병사의 나이가 자신보다도 훨씬 적다는 걸 알았을 때, 지극히 일상적인 병사들의 소지품(성경책과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 사랑하는 이의 사진 등)을 보통의 생활공간이 아닌 박물관에서 접했을 때, 죽음 앞에서는 연합군이든 아니든 간에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 마음이 복잡했대.  


그래서 붉디붉은 양귀비 꽃(오른쪽 페이지 우측 상단부)은 꼭 스크랩북에 붙여 두고 싶어서 포장지 종이가 꾸깃꾸깃해져도 절대 버리지 않고 기숙사 방까지 가지고 오려고 했대. 세계대전의 피해자를 상징하는 꽃이거든. 오늘날까지도 11월 11일이 되면 1차 세계대전 종전일을 기념하여 유럽의 각국 지도자들과 정치인들, 인플루언서들이 양귀비 꽃 배지를 달고 인터뷰를 해. 영국은 런던탑의 해자와 정원을 양귀비로 가득 꾸며 놓을 정도로 종전일을 기억하는 일에 진심으로 임하기도 하고.


이렇게 마음 한편이 휑- 킁- 해지는 수학여행의 조각들을 추억상자에서 꺼내다 보니 분명 생각이 난 걸 거야. 굳이 수학여행을 통하지 않았더라도, 자유 여행을 통해 엿보았던 유럽 곳곳의 상흔들이 말이야. 그래서 대뜸 같은 페이지에 붙여 놓은 거야. 당장 손에 잡히는 것 먼저. 그중 하나가 안네 프랑크의 집이었고.







주인장이 독일어를 배운 건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운이 좋게도 독일어 공부가 성향에 맞았고, 학교의 커리큘럼과 교수님의 열정, 교환학생 프로그램도 훌륭했어. 배움에 가속도가 붙는 건 시간문제였지. 독일어가 재밌으니 독일도 궁금하고 유럽과 유럽연합에도 자연스레 관심이 갔대. 그래서 유럽학 쪽으로도 석사 과정을 밟은 거였고.


독일어를 계속 붙들고 있으면서 느낀 게 많았대. 독일인도 아니면서, 독일 자동차 회사가 물의를 일으키면 괜스레 조마조마해하고, 난민이나 환경 이슈처럼 국제적으로 논의되는 문제에서 과감하게 지지의 말을 내뱉을 때면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지. 특별히 지난 과거, 과오를 잊지 않으려는 독일의 애도와 반성, 회고적 태도가 주인장의 마음을 흔들었어. 전공과목에 대한 자부심이었을까, 몰입이었을까. 독일의 소식에 많이 웃고 울었대. 


무엇보다도 유럽을 알아가게 된 모든 여정의 시작점이 독일어라는 언어였기 때문에, 일기의 대부분을 독일어로 적은 안네 프랑크의 활동에 관심도 많았지. 그래서 유럽에 있는 동안 꼭 한번 안네 프랑크의 집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대. 암스테르담이면 뤼벤에서 그리 멀지도 않았으니까. 


안네를 찾아온 건 주인장뿐만이 아니었지. 전 세계에서 어린 소녀의 일기를 기억하고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암스테르담을 찾았어. 박물관 앞은 북적북적했고, 주인장과 친구는 사전 예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시간 정도 밖에서 서 있어야 했지. 교대로 줄을 빠져나가 핫쵸코를 사 마시면서 몸을 녹이다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드디어 입장했었대. 


내부 촬영은 불가했지만 덕분에 안네 일가의 피난 생활을 집중해서 있었지(휴대폰 카메라 하나 들이밀지 않는 걸로도 여행의 집중도가 올라갈 있다는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워). 빨간 체크무늬가 인상적인 안네의 일기장도 전시가 되어 있었지. 방명록에 한국어로 메모를 남기고 왔다는데, 누가 읽기라도 했을까?



오늘 소개한 4, 5 페이지에서 한참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 나눠주던 한국어 팸플릿의 조각들을 두 쪽에 걸쳐 붙여 놓은 페이지가 나와. 추억상자의 구석진 곳에 입장권과 따로 놓여 있던 팸플릿을 찾아내고선 주인장이 신나서 붙였던 페이지지. 오로지 안네에게 헌정하는 페이지야. 그리고 독일어를 좋아하다가 이 지경(?)에 다다른 주인장 스스로를 위한 페이지이기도 해. 


주인장은 가끔 생각에 잠겨. "내가 어쩌다 그런 공부를 했고, 지금 이러고 지내는 걸까? 이게 내가 되고 싶었던 어른의 모습인가?" 하고서. 


그러고 보면, 주인장이 어렸을 때 자연스레 떠올렸던 어른의 이미지는 좀 더 지루하고 정적이고, 세속적이었어. 뾰족구두를 신고, 하고 싶은 걸 맘껏 하는 여성을 어렴풋이 그리면서도 신데렐라의 꿈을 한편에 품고 있었지. 그런데 막상 어른이라 불리면서도 어린이처럼 지내려고 하는 요즘, 주인장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상황이 꽤 달라. 뛰고 싶다면 언제든지 뛸 수 있는 운동화를 신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기 어렵다고 낙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뭔가 해보려고 하지. 신데렐라가 되기보단 뮬란이 되고, 심바가 되고 싶다고 밝혀(말했지, 주인장이 디즈니 좀 봤었다고?). 그때마다 들춰보는 고전 중엔  <안네의 일기>가 있고(오, 이렇게 생각하니 안에 <안네의 일기>를 기획전처럼 담아 주어 정말 고마운 걸!).



너는 어때? 어쩌다 오늘, 그렇게 지내? 너에게도 <안네의 일기> 같은 페이지나, 독일어 같은 언어가 있어? 페이지, 그 말, 읽어보고 들어보고 싶다.









관련 발행 글


뤼벤대학교 유럽학 석사생의 수학여행기 (1) ~ (6): 

https://brunch.co.kr/@wobistdufreude/73

https://brunch.co.kr/@wobistdufreude/74

https://brunch.co.kr/@wobistdufreude/75

https://brunch.co.kr/@wobistdufreude/76

https://brunch.co.kr/@wobistdufreude/77

https://brunch.co.kr/@wobistdufreude/78

안네 프랑크의 집 방문기: 물안개의 암스테르담, 안네 프랑크를 만나다

https://brunch.co.kr/@wobistdufreude/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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