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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Apr 02. 2024

필요했던 거지, 쉬어가는 시간이

봉쥬르: PAGE 1

(시작하면 돼? 알았어. 친절하고, 밝게. 또박또박.) 

안녕, 난 봉쥬르라고 해. 


우리 주인장이 지난주에 나와 동생들 - 감자, 윈도우, 대들보 - 를 소개했다지? 아주 간략한 소개라고 들었는데 괜찮았어? 주인장이 어떻게 우리 네 남매의 이름을 지어줬고, 우리를 무엇으로 채웠는지에 관해 얘기했다며? 충분한 설명이 되었을지 모르겠네. 


오늘부턴 우리 네 남매 - 맞아, 주인장의 스크랩북 네 권 말이야 - 가 직접 마이크를 잡아보려고 해. 내가 맏이로서 스타트를 끊었고. 아무래도 주인장이 마이크를 잡으면 일장연설이 되거나 만담이 되기 일쑤거든. 그럴 바에야 우리가 장씩, 또박또박 일러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우리 안에 무엇이, 어떻게 붙어있는지 설명해 주려고. 내 입장에선 일종의 내면 토크라고 보면 되고, 네 입장에선 스크랩북 샘플 발표가 되겠네. 무엇이 되었건, 재미있었으면 좋겠고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알았어. 서론은 그만하고 바로 페이지 소개로 들어갈게.) 

미안. 주인장이 옆에서 보채서 말이야. 자주 저래. 스크랩북 메이커들은 굳게 닫힌 스크랩북의 표지 앞에서 발을 동동 굴리거든. '아, 어서 빨리 보여주고 싶은데.' 하는 마음이 드나 봐. 조각난 것들, 흩어져 있던 것들을 한 데 모아 놓았다는 게 큰 위안이 되고 자랑거리가 되나 봐. 


네게도 조각난 것들이 있어? 상자 속에 넣어두고서 - 그러니까, 시야에서 치워버리고서 - 체하는 것들이야?  위에 먼지가 내려앉아 있진 않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버리진 못하겠고?


만약 그렇다면 너도 우리 주인장과 비슷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하여튼 정은 많아가지고.



주인장은 소문난 맥시멀리스트거든? 근데 그런 주인장도 스크랩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어. 


버리지 않고선 정리가 되질 않는다는 거야. 


하하. 옆에서 주인장의 미니멀리스트 남편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네. 하지만 중요한 하나 있어. 주인장이 말한 '버린다'라는 개념이 무언가를 쓰레기통에 갖다 넣는 행동만을 의미하진 않거든.


주인장에게 버린다는 건 본래 모습을 해체하는 거야. 그러면서 해체된 대상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 혹은 모습을 골라내는 거지. 취사선택이자 편집이야. 불필요하다 생각하는 부분을 잘라내는 결단이 필요한 작업이야. 힘들지. 에너지 소모도 꽤 있고. 


또, 버린다는 건 엉켜 있는 실타래를 푸는 걸 의미하기도 해. 질서를 부여하는 거야. 이때 질서는 오롯이 버리는 주체 - 스크랩북 메이커 -가 만들어. 사적이고 은밀하지. 그런데 그 질서가 꼭 단정하지만은 않아. 중구난방일 수도 있고, 가나다 순의 정렬일 수도 있고, 겹겹이 쌓아 올린 탑일 수도 있고, 의식의 흐름일 수도 있지. '꼭 이래야만 한다'는 법이 없으니, 그야말로 스크랩북 메이커에 의한, 자발적인 질서지. 어때, 혁명적이지?




표지를 한 번 넘겨봐. 첫 장은 비교적 시원시원하네. 복잡하지 않아. 


넘기는 맛이 있다고? 아 그렇지. 지난주에 말했듯이 나는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게 몸집이 좀 큰 편이거든. 종이 신문처럼 바스락 거리진 않지만, 아트북처럼 묵직하진 않지만, 적당히 넘길 맛이 나는 노트라고. 



내 안에는 주인장이 유럽에서 공부할 때의 추억 조각들이 담겨 있어. 그 첫 장에는 벨기에 뤼벤(Leuven)에서 수학했을 때의 물건들이 붙어 있지. 


수도 브뤼셀(Brussels)에서 기차 타고 30분이면 도착하는 뤼벤은 학생 도시이자 은퇴자들의 도시래. 그 덕에 치안이 훌륭했었다고 하더라고. 밤 열 시가 다 되어서 프랑스 어학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까지 주인장이 도보로 혼자 걸어가는 내내 아무 사건 사고도 없었다는 걸 보니, 거의 한국의 치안 수준과 맞먹을 정도였지. 


그곳에서 주인장은 1년 간 석사과정을 밟았어. 처음엔 2년도 아니고 1년 만에 석사학위를 딸 수 있다고 좋아했었대. 그런데 알고 보니 학업 강도도 배로 압축이 된 프로그램이어서 엄청 힘들었다고 했어. 빨리 끝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배로 노력해야 한다는 거였을 텐데, 왜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막판엔 '졸업할 수 있을까? 장학금 받고 왔는데 졸업을 1년 만에 못하면 장학금을 다 토해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많았대. 


래서 그런지 첫 장에 졸업식 날 도서관 앞에서 학사모를 던지며 기뻐하는 학생들의 그림을 붙였더라고. 이것저것 아무렇게나 붙이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은근히 무의식을 드러내는 배치였어. 그렇게 걱정했지만 잘 견뎠고, 졸업했다는 기쁨이 컸나 봐. 


옆 페이지에는 뤼벤 중심부의 상징과도 같은 뤼벤 링이 돋보이는 지도와 차마 해체하지 못한 뤼벤의 지도를 미니 클립으로 페이지 상단부에 고정해 놓았어. 아까, 버린다는 개념에 본래의 모습을 해체하는 의미도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해체가 늘 성공하는 건 아니야. 스크랩북의 재료들 중에는 해체를 포기할 정도로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는 게 최선인 물건들이 많거든. 특히 지도들이 그래. 고이고이 접어 두었다가 쫙 펼쳐서 도시의 모습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지도를 해체하면 아무래도 매력도가 떨어지거든. 그냥 평면 그림이 되어 버리니깐 말이야.


지도 말고 또 뭐가 붙어 있는지 볼까? 아하. 유학생활을 위해 꼭 필요했던 것을 붙여 두었네. 학생 교통 카드, 학생증, 해산물 뷔페의 명함, 그리고 영화관 멤버십 카드. 응? 교통카드랑 학생증은 알겠는데, 해산물 뷔페랑 영화관은 뭐냐고? 


생각해 봐. 학생이라고 24시간 공부만 했겠어? 그랬다간 머리가 터져 버릴걸? 


유럽에선 고급 요리 취급받지만 한국에선 평소에도 즐겨 먹었던 해산물, 뭐 거창한 건 아니야, 굴이나 새우, 그런 것들을 맛있게 구워주는 식당이 뤼벤 근처에 있었대. 웍 다이너스트(WOK Dynasty)라고 중식 소스가 돋보였던 곳인데, 주인장의 유학시절 벨기에에 계셨던 주인장 아버지의 친구분 - 주인장이 키다리 아저씨라 부르는 분 = 이 주인장을 챙겨 주고 싶어서 몇 번이고 데려갔던 곳 이래. 


나중에 키다리 아저씨께서 주인장의 결혼식에 와서 허허 웃으셨다는데, 그때 주인장이 아저씨를 보고서 울컥했다고 하더라고. 


영화관 멤버십 카드는 키네폴리스 카드야. 뤼벤 시내에 있던 영화관 체인점이었지. 우리나라 영화관과 퀄리티 차이도 거의 없고 좌석도 푹신했던 영화관이어서 이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었어. 


주인장은 시험기간을 제외하고서 흥미로운 영화가 있는 날이면 엘사라는 이름의 마케도니아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대. 유럽 교육사를 주제로 한 사범대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한두 마디 섞다 보니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고 하더라. 같은 석사 과정 중이어서 관심사도 비슷한 게 많았는데, 어째 전공과목 이야기보다 재밌었던 건 영화 이야기였대. 그래서 유학기간 중에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을 땐 자연스레 서로를 떠올렸다더라.  라라랜드, 덩케르크, 다 엘사랑 봤대. 


필요했던 거지, 쉬어가는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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