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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Apr 09. 2024

모두의 하늘이 푸른색이길

봉쥬르: PAGE 2 - 3

다음 장으로 가볼까? 아, 여기군. 이곳에선 주인장이 수학했던 도시와 나라 - 뤼벤과 벨기에 -에 관해 좀 더 속속들이 알아볼 수 있어.



2쪽과 3쪽 사이에 2.5쪽처럼 끼워 넣은 큼지막한 팸플릿이 가장 먼저 눈에 띄네. 죽음의 참호(Trench of Death)라 불리는 1차 세계대전의 격전 중 하나야. 주인장이 유로-아시아 썸머스쿨 당시 필드스터디를 갔던 곳 중 하나야. 이제르 강(Yser) 전투 때 수많은 벨기에 병사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지. 방문하면 참호를 걸어 다니면서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떠올려 볼 수 있어. 생각보다 매우 좁고 깊대.


흑백 사진 속 군인주인장과 비슷한 또래이거나 더 어린 친구로 보이네. 하지만 어림짐작의 나이 군복에 싹 덮인다. 군인이란 신분과 상황이 사진 속 인물의 다른 모든 것들을 묵살하네. 슬픈 일이야. 화가 나는 일이고. 너는 어때, 스스로를 가리는 옷을 입고 있어? 그때 제가 네 사진을 찍는다면 그 사진은 어떤 색으로 기록될까? 나도 주인장도 전쟁을 몰라. 듣기만 했고, 읽기만 했지. 알고 싶다고 말할 수도 없어. 인간의 잔혹함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끔찍한 일이잖아.


우리에겐 그저 푸른 하늘이 누군가에겐 잿빛일 수 있단 현을 붙잡고 잠시 기도해.


모두의 하늘이 푸른색이길.



2쪽, 그러니까 팸플릿을 기준으로 왼편에는 주인장이 뤼벤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때 받았던 각종 팸플릿 자료들이 붙어 있어.


도시의 상징물이었지만 학교 건물들을 오갈 때마다 지나쳐서 어쩐지 학교의 본부 같았던 구 시청사(2쪽 상단부 좌측)의 야경. 주인장은 수업을 가야 할 때마다 구시청사 근처의 카페와 펍에서 여유롭게 햇빛과 밤공기를 즐기는 어르신들이 보여 아주 부러웠다고 하네. ‘수업만 끝나봐라, 시험만 끝나봐라, 나도 저기 앉아서 커피 한 잔 할 테다’ 했다는데, 막상 시간이 주어졌을 땐 뤼벤 바깥을 구경하기 바빠서 구시청사 광장을 제대로 즐기진 못했대. 유럽살이가 좀 그래. 주변 나라, 도시들로의 이동이 워낙 자유롭다 보니 집으로 거점 삼은 도시 구경엔 좀 소홀해져.


STUK이란 이름의 학생 문화 공간의 소개 포스터와 ‘숫자/측량 그 이상을 살아라(Live beyond measure)’이란 문구가 돋보이는 종이 자, 그리고 학식당 알마(Alma)의 홍보물도 보여.


주인장은 아주 가끔 친구들과 외식을 하자며 기숙사의 공용 주방이 아닌 뤼벤 시내 식당으로 모험을 떠나곤 했어(보통은 서로의 기숙사에서 모여 같이 요리를 해 먹었지요). 호기롭게 주문했던 음식이 영 입에 안 맞으면 다들 ‘알마보다 못하다니!’ 하고 말하곤 했지.


알마는 최소한 가성비 좋았으니까. 유럽에선 외식이 꽤 비싸거든. 같은 음식이더라도 직접 해 먹을 때보다 사 먹을 때 훨씬 돈이 덜 들어. 우리나라는 그 차이가 좀 적은 편이라 외식 문 턱이 상대적으로 낮지(하지만 코로나 이후로 생활 물가많이 올라 어느 쪽이든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네).


지음지기의 두 번째 단행본 <너와 나의 니은> ‘데우고, 채우고, 달래는‘ 에서도 밝혔듯이, 주인장은 알마의 식단을 꽤 즐겼어. 접시에 담는 만큼 무게를 재서 즐기는 제철 샐러드와 ‘오늘의 수프’란 간판 아래 뜨뜻하게 끓고 있던 토마토 수프, 플랑드르 지방의 가정식 특식(바스러지는 식감이 일품이었던 감자 크로켓과 미트볼 정식 등) 모두 알마와 함께한 기억들이라고 했거든.


그러고 보니 혀 끝으로 하는 기억엔 뭔가 특별한 게 있어. 다른 감각들을 활용한 기억에선 찾아볼 수 없던 힘이 느껴진달까. 입체적이고 섬세한 이지. 꾹 닫은 입 속에서 혀를 굴리게 하고, 오늘의 점심 메뉴를 고민하게 하는 힘! 액션을 부르는 기억이야.


너의 혀 끝 기억 무엇이야? 감칠맛 가득한 매실장아찌? 배신하지 않는 라면 수프의 맛? 밋밋하고 미끌거리는 코코넛 입자?


그 기억엔 어떤 힘이 있어? 인내? 스퍼트? 비워내기? 머무르기? 그 기억을 함께 나눈 이는? 친구? 연인? 가족? 멘토?


와. 질문이 끊이질 않아.

이 또한 혀 끝 기억의 힘이겠지?





팸플릿을 넘겨 3쪽으로 눈을 옮겨볼게. 브뤼셀에 있던 복합 문화 공간 보자르(Bozar)의 홍보물 - 아스팔트 도로로 다이빙 하는 무용수 - 과 뤼벤의 페터스 서점(Peeters)에서 전공 서적을 사고 받았던 북마크가 보이네.


그리고 ‘죽음의 참호’ 팸플릿의 분위기를 이어갈 흑백 사진도 하나 보여. 1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국제 콘퍼런스의 홍보물이다. 주인장은 벨기에에 2차 세계대전만큼이나 1차 세계대전의 흔적들이 많이 보다고 했어. 독일(어)을 전공 삼았던 학부 시절엔 히틀러와 2차 세계대전 레퍼런스를 접할 일이 많았는데, 유럽학을 전공 삼았던 석사 시절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고 하네.


유럽학과 국제학 전공생들에겐 세계대전 전체와 그 이후의 사회 변화에 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잦았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떻게 협력(유럽 통합)을 해왔는지에 주목하는 커리큘럼이 많았기 때문이래. 그래서 주인장은 한 국가의 정체성에서 한 걸음 더 나간 커뮤니티 -유럽(연합)- 의 정체성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고 하네.


(어? 뭐라고? 아, 네 논문 주제를 은근슬쩍 꺼내지 말라고? 저기 저 캐릭터 얘기나 하라고? 알았어, 알았어.) 옆에서 주인장이 화제를 돌리라고 하네. 뭐, 공부 얘긴 또 말할 기회가 있겠지.


3쪽의 우측하단에 웬 꼬마가 울고 있어. 엑스 표 입 모양과 단순한 선과 선명함 색감. 토끼 '미피'가 떠오른다. 역시나, 미피를 그린 딕 브루나(Dick Bruna) 작가의 일러스트지.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아티스트고. 주인장이 뤼벤에 있을 때 부고 소식이 들려와 한동안 서점마다 딕 브루나를 추모하는 가판대가 따로 마련될 정도벨기에에서도 유명한 사람이야. 뤼벤은 벨기에의 도시이지만, 생활 언어도 프랑스어가 아닌 네덜란드어일 정도로 네덜란드 문화의 입김이 센 곳이거든.


여기 붙어 있는 포스터는 '아동 노동을 멈추라(Stop Kinderarbeid)‘라는 메시지가 담긴 일종의 사회 운동 포스터야. 나무판자로 추정되는 큼지막한 물건을 잔뜩 짊어지고 공허한 표정으로 눈물 한 방울 뚝 흘리는 아이라니, 더치를 못 하더라도, 더치와 비슷한 독일어로 뜻을 유추를 하지 않더라도, 가슴 아픈 장면이지.


무거운 주제에 알록달록한 색을 입힌 딕 브루나 작가의 과감한 표현력이 멋. 아픔을 색색의 퀼트 이불로 덮고 보듬어주는 기분이 고.


세계대전, 학교, 문화, 혀 끝 기억, 과거와 정체성, 아픔... 문득 주인장이 벨기에에서 얻어 온 게 학위뿐만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 전장에 다시 세워진 건 박물관과 신축 건물들 뿐만이 아니었잖아? 전쟁을 기억하고 감정을 보듬는 사람들도 다시 일어섰어. 주인장도 그중 한 명이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관련 발 글


수프에 대하여: 데우고, 채우고, 달래는

https://brunch.co.kr/@wobistdufreude/413


딕 브루나의 미피: 토끼가 울고 있어요. 엑스 자 입모양을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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