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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May 24. 2023

데우고, 채우고, 달래는

월간 지음지기: 2023년 5월 “수프 끓이기”



국물 요리를 즐기려면 약간의 불편함을 견뎌야 한다. 먹기 적당할 정도로 식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후후 불어 혀가 데이지 않도록 유의하며 먹어야 하고, 옷에 튀기거나 흘리기도 쉬우니 조심해서 숟가락 젓가락질을 해야 하며, 혹 식었다면 다시 데워 먹어야 하는 수고까지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불편함을 견디면서 국, 탕, 찌개, 수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국물 요리를 반긴다. 맛집이라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도 사 먹고, 직접 요리해 보겠다며 식재료를 구입하기도 하며, 매일같이 한 냄비 끓여 가며 동거동락하며 지낸다.


초등학생 시절의 가족 서가를 기억한다. <영혼을 달래는 닭고기 수프>라는 제목의 책이 꽂혀 있었는데 누군가 오래 손에 쥐고 읽었는지 표지 가장자리가 조금 벌어지고 구겨져 있었다. 지금이야 국물 요리를 찾아 먹는 입장이지만, 꼬마 시절엔 그보다도 맛있는 게 너무 많았기에 영혼이라는 ‘위대한 개념(?)’을 달래는 음식이 ‘고작’ 닭고기 수프라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스테이크나 햄버거, 뭐 다른 것도 많을 텐데, 미국엔.’ 하는 생각을 하던 중 문득 눈이 뜨이게 하는 건 아빠의 식사 풍경이었다. 이것저것 차린 게 많은 상이더라도 아빠가 가장 먼저 숟가락을 담그는 곳은 국그릇이었다. 호로록. 한 입 들이킨 후에 만족한다는 듯 걸걸한 반응을 보이는 모습은  ‘어느 스탠드업 코미디 배우의 시그니처 동작' 같아 보였다. “맛있어?” 하고 묻는 질문에 아빠는 “크, 캬, 시원하다, 그럼!”이라 대꾸하거나 연이어 국그릇으로 숟가락을 들이밀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식사를 마친 후 서가로 달려가 책 제목을 한번 더 들여다보면서 질문했다. ‘그럼 아빠의 영혼도 수프에게 위로를 받은 건가요?’ 책은 대답하지 않았다.


흔한 요리 기술 없이 떠난 유럽 유학길 위에서 허기를 채우기 위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학식당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학식당보다는 기숙사의 공용 주방에서 홀로 미역국을 끓이거나 카레를 만들고 삼겹살 만찬을 준비하는 등 집밥 내공을 쌓아갔지만, 아무래도 막 도착한 낯선 땅에서의 끼니 해결은 누가 차려준 상이 편했다. 그런데 학생들의 편의를 위한 식당 치고는 가격 책정이 꽤나 까다로웠다. 메인 요리나 반찬 등의 구성이 정해져 있는 메뉴가 아닌 경우, 접시 위에 원하는 음식을 골라 담고 저울 위에 나만의 플레이트를 올려 무게에 따라 가격을 책정하는 방식이었다. 나만의 플레이트의 구성품목으로 가장 인기가 많은 건 빵과 모둠 샐러드, 콜드 파스타였는데 건강하고 저렴하게 먹으려던 게 이것저것 담다 보면 앞의 조건만 충족시키고 끝나는 경우가 잦았다. ‘뭐 좀 더 저렴하고 든든한 거 없나.’ 그때 학생들이 붐비지 않는 구석 코너의 한 가판대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보니 그곳은 수프 가판대였다. 마녀의 솥을 닮은 커다란 통에 허리가 기다란 국자가 담겨 있었고, 얼마나 끓여 대는지 가까이 가기만 해도 몸이 따뜻해졌다. '오늘의 수프' 하고 땡땡(:)으로 소개되어 있는 걸로 보아 매일 메뉴가 바뀌는 몇 안 되는 학식 메뉴인 듯했다. ‘수프도 많이 담느냐 적게 담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질까.’ 주변에 저울이 있는지부터 살폈다. 그런데 웬걸, 작은 그릇에 담을 건지, 큰 그릇에 담을 건지만 정하면 된다고 한다. 그릇 가득 채우든, 절반만 채우든 상관없단다. 그릇 정찰제였다. 곁들여 먹을 음식으로는 빵이 있었는데, 그 또한 절반 크기냐 풀 사이즈냐에 따라 가격이 나뉠 뿐 무게를 재진 않았다. 운이 좋으면 절반 크기지만 조금 덩치가 큰 빵을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는 거다! 한 푼 한 푼이 소중했던 학생이었던 나는 인심 후한 수프 가판대에 금방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나무인 척하는 플라스틱 식판에 수프 한 그릇과 빵 하나를 올리고선 계산대로 향했다.


결코 적지 않은 양, 허기를 달래줄 만큼. 4유로를 넘지 않는 금액, 외식인데도 부담스럽지 않고. 그릇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전해지는 온기는 장갑 없이 외출한 걸 잊어버릴 정도. 한 숟가락에 건더기와 국물을 적절히 담아서. 호로롭! (…)


그 후 수프 가판대는 나의 단골 식당이 되었다. 토마토 야채수프, 셀러리 닭고기 수프, 양송이 수프, 감자 수프, 브로콜리 수프, 강낭콩 굴라쉬 수프 등… 매일 달라지는 수프 한 그릇이면 어릴 적 서가에서 듣지 못했던 답변마저 들리는 듯했다. 든든했다. 무언가 뜨끈하게 데워지는데, 그게 꼭 내 배만은 아닌 것 같았다.


국물 요리를 즐기려면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먹기 적당할 정도로 식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후후 하는 기대감을 키워야 하고, 맛있게 먹은 흔적을 자국이나 냄새 등으로 어딘가에 남길 수 있으니 누군가 그 흔적을 알아차렸을 때 읊어줄 맛 평가를 준비해야 하며, 혹 식었다면 다시 데우면서 기쁨의 댄스를 춰야 하니 몸을 적당히 풀어놓아야 한다. 재미있는 예언을 하나 하자면,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바깥 날씨에 상관없이 국, 탕, 찌개, 수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국물 요리를 찾을 거라는 거다. 엄마가 여행 가기 전에 끓여 놓던 탕이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한 숟가락을 뜰 거고, 유학 시절 나를 배부르게 했던 수프를 떠올리며 마트에서 토마토와 쿠스쿠스를 찾기도 할 거다. 거의 매일 한 냄비 끓여 가며 아침, 점심, 저녁을 반복할 거다.


어떤 빛깔, 향기, 기억의 한 그릇이 되건, 우렁차게 인사하며 식사할 수 있기를. 보나뻬띠(Bon Appetit)! 구텐 아피텥(Guten Appetit)! 잘 먹겠습니다!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ㄴ(니은)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글쓰기 좋은 질문 642"에 수록된 글감 <수프 끓이기>에 영감을 받고 그림을 그린 지음지기의 그리는 사람(최정연 작가)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확인해 보세요!


<특식>, 최정연: https://blog.naver.com/choijungyon/223110489156

인스타그램: http://www.instagram.com/drawnnwrittenby/

포트폴리오: writtenndrawnby.notion.site​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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