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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May 16. 2023

먼지 덮고 자기 전에 올리는 책상의 기도문

월간 지음지기: 2023년 5월 "오밤중 책상의 사생활"

아마 내일도 우리 주인장은 나를 찾겠지. 어제도 오늘도 그랬으니 말이야. 오른편엔 읽을 책, 왼편엔 읽고 있는 책을 두고서 가운데 빈 공간에서 노트를 펼칠 거야. 그게 노트북이건 아날로그 노트이건 상관없어. 내겐 그저 노트일 뿐이니깐.

 

쿨럭. 어이구 먼지가 많네.
 

주인장은 자신의 무게를 가득 눌러 담은 팔과 손가락을 내 위에 턱 하니 올려 두고서 문장을 완성하겠지. 그가 루틴이라 부르는 활동인데, 지켜보니 꽤나 영향력 있는 건가 봐. 루틴을 수행하기 전과 후의 주인장 표정을 비교해 보면 사뭇 다르거든. 불평불만을 잔뜩 품고 내 앞에 앉았더라도, 루틴을 끝내고 의자를 내게서 멀리 밀어 일어날 땐 ‘다 털어냈다,’ ‘이젠 내 손을 떠난 일이야!’ 하는 표정을 짓고 있거든. 쏟아지는 햇살을 적당히 차단해 주는 시폰 커튼처럼 살랑살랑 움직이는 표정이야. ‘될 대로 되라지' 하는 후련함이 보이는 얼굴이지.


그런 주인장을 보면서 기지개를 켜. 주인장의 팔과 손가락에 눌려 있던 부분을 중점적으로 풀어주지. 며칠 전부터 주인장이 필라테스 수업을 듣는데, 그 수업 내용을 노트에 종종 적더라고. 곁눈질로 읽어 보니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는 현대인들은 이전보다 몸통이 훨씬 더 굳어 있다는 거야. 목만 움직이는 스트레칭이 아닌 몸통을 꽈배기처럼 뒤트는 스트레칭이 필수라는 내용을 기억하면서, 이쪽저쪽 몸을 비틀어 주지. 주인장이 나를 떠나 침실로 들어가는 새벽 시간에 주로. 달밤의 체조라는 게 나의 스트레칭 루틴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어.


쿨럭. 쿨럭. 쿨럭.


최근 들어 주인장과 공유하는 취미가 생겼는데, 그게 묘한 희망을 갖게 하더라고. 들어봐. 그 취미란 건 미니멀리즘에 관한 독일 팟캐스트를 청취하는 건데, 낮 시간 동안 내 위에서 주인장이 작업할 때 곧잘 틀어놓는 거야. 팟캐스트 내용이 내용인 만큼, 맥시멀리스트인 주인장도 정리정돈과 청소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지. 실제로 효과가 있던 게, 며칠 전부터 괜히 내 속(서랍)을 뒤집어 놓고 읽을 책 목록을 수시로 점검하더라고. 주변 환경이 내게 미치는 영향, 물건의 수명, 쓸모없음의 쓸모와 같은 내용을 노트에 쓰는 일도 잦아졌고.


달밤의 체조를 하는 김에 달님을 향한 기도를 같이 올리게 된 게 바로 그 때문이야. 주인장이 정리 정돈에 재미를 좀 붙인 김에, 부디 내 주변에, 구석에 엉겨 붙은 먼지를 조금 치워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기도하지. 평소 같았더라면 내게 엉겨 붙은 먼지덩이를 본 체 만 체 할 거라고 단념하겠지만, 요즘은 좀 달라 보이거든. 그러니깐 기도할 맛이 나는 거 아니겠어. 혹시 모르잖아, 하고서. 조금은 치워줄지도 몰라, 하고서.


미니멀리즘 운동으로 몇몇 물건들이 폐기 처분되겠지만, 확실히, 날 버릴 것 같진 않거든. 이래 보여도 난 원목 가구이고, 그 자체로 작업실 역할을 하니깐 말이야. 주인장의 친구들이 결혼을 축하한다면서 십시일반해 사준 선물이란 말이지. 누가 선물을 쉽게 내다 버리겠어, 안 그래?


에취!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ㄴ(니은)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글쓰기 좋은 질문 642"에 수록된 글감 <당신의 책상은 밤에 무슨 생각을 할까?>에 영감을 받고 그림을 그린 지음지기의 그리는 사람(최정연 작가)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확인해 보세요!


<한밤의 콘서트>, 최정연 : https://blog.naver.com/choijungyon/223103608357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drawnnwrittenby/ 

포트폴리오: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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