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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Mar 19. 2024

모아 놓으니 멋지다

썰의 시작

“뭘 버릴 수 있나. 모든 물건에 이야기가 얽혀 있는데.”


초대받아 집에 온 사람들 모두, 짠 것도 아닌데 비슷한 말을 했다. 생활 속 애니미즘 신앙이라도 발견한 듯. 맥시멀리스트를 이해해 보려는 듯. 오묘한 어투였다. 그 말에 담긴 속뜻이 감탄이었는지 한탄이었는지 집주인은 알 길이 없었다. 잠깐의 버퍼링도 없이 속마음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는 이들을 집에 초대하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뭐, 무엇이 되었건,  물건을 잔뜩 쌓아두고 사는 집주인을 이해해 보려고 한 말이었으리라.


집주인이 물건에 얽힌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대화는 철저히 의식의 흐름에 의해 진행됐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날, 집주인은 날이 추으니 친구만 괜찮다면 집으로 가서 커피 타임을 갖자고 한다. 친구는 개의치 않아 하고, 집주인은 주소를 카톡으로 보낸다. 배달 올 음식이 없을 시간이라 짧고 가는 초인종 소리에 친구가 왔겠거니 하면서 누군지 확인도 않고 문을 연다. 친구의 코트를 받아준 다음, 역에서 찾아오기 힘들진 않았냐고 묻는다. 커피 한 잔을 대접하겠다고 한다. 웰컴 드링크가 빠지면 섭섭하니까. 겨울이니까 기왕이면 따뜻하게(얼죽아는 잠시 진정시킨다), 집으로 매달 배송되는 드립 커피 원두로 정성스레. 집주인은 커피 한 잔을 위한 갖은 도구를 꺼내며 원두 설명을 한다. 그러다가 원두를 매달 집으로 배송받는 구독 서비스를 소개하고, 어쩌다 커피 구독을 시작했는지 이야기한다. 월급을 처음 받아 보았을 때, 코로나로 세계가 끙끙 앓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생생한 경험담 풀이에 집주인은 신이 나고, 친구는 그런 집주인을 신기해한다. 어디서 보고 들은 대로 커피를 다 내렸을 쯤엔, 집주인은 분주해진다. 맛있는 커피는 이쁜 잔에 담아 마셔야 한다며 찬장에 따로 보관해 둔 컵을 찾는다. 계절에도 딱 어울리는 컵이라면서 기대감을 높인다. 딱 봐도 외국에서 사 온 물건. 그 안에 커피를 가득 부으면서 집주인은 왜 이 컵을 따로 보관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교환학생 시절, 독일의 어느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글뤼바인 한 잔을 사 마시고 기념품으로 챙겨 온 컵이라고 한다. 마켓에서는 음료 주문 시 컵 보증금을 함께 내기 때문에, 컵을 가게에 돌려주지 않고 자신처럼 챙겨 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야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쩌다 독일에 가게 되었는지, 독일어를 전공 삼은 대학생활이 어땠는지까지 이어진다.


그러다 집주인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면서 잠시 자리를 비운다. 한참 동안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친구는 동행 없는 커피 타임의 어색함을 커피 한 모금으로 견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주인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나타난다. 먼지가 살짝 내려앉은, 두꺼운 노트. 아니, 책인가?


“스크랩북이야 이거."


친구는 집주인과 나란히 앉는다. 함께 스크랩북을 뒤적인다. 커피 식는 줄도 모르고. 한참 동안 구경한다. 공연 팸플릿, 기차 시간표, 포인트 카드, 메모장, 각종 증명서 … 뭐가 참 많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이걸 어떻게 만들었어?”

“틈틈이 자르고 붙이고 메모했지."

“오래 걸렸겠는데?”

“머리 비우고 싶을 때, 어릴 때처럼 손을 움직이면서 집중하고 싶을 때, 여행 가고 싶은데 당장 떠나지 못할 때 … 틈틈이 했어."

“옛날 것도 많은데 이 메모들은 다 어떻게 쓴 거고?”

“아직 기억력이 좋거든(이때, 집주인은 어깨를 으쓱한다). 영 모르겠다 싶으면 네이버 클라우드나 일기장 뒤져보면 되고.”

“일기 아직도 매일 써?”

“대학원 다닐 때, 엄마가 일기장 좋은 거 선물로 준 이후론 매일 쓰지. 모닝페이지를 안 이후로는 더 많이 쓰고. 그전엔 그냥 스케쥴러에 마구잡이로 끄적였는데 쓰는 것도 하다 보니 늘더라고. 이젠 펜 없이 걷는 게 불안할 정도야.”

“이렇게 모아 놓으니 멋지다."

“컬러링북 있지, 몇 년 전에 유행한 거. 나한텐 스크랩북 만드는 게 컬러링북 같은 거야. 몰입과 정리의 시간이거든.”

“맥시멀리스트에게 어울리는 취미야.”


이렇게. 저렇게. 집주인은 이제 손뼉을 치며 스크랩북 제작 비하인드를 털어놓는다. 맥시멀리스트도 맥시멀리스트 나름이어서, 정리를 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쌓아두고 흐트러 놓은 것들을 한 데 모아서 혼돈스러운 질서를 만든다고. 스크랩북 메이킹은 그 질서 중에서도 가장 부피가 작고, 경제적이면서, 재미있는 작업이라고.


그렇게. 저렇게. 만든 스크랩북, 그리고 그걸 펼쳐 보면서 자유분방하게 흐를 집주인의 의식을 이 책에 담아보려고 한다(눈치챘겠지만, 집주인은 접니다). 그간 모았던 물건들이 추억 상자를 가득 채웠기에. 조금이라도 툭 건드렸다가는 우당탕탕, 쏴아아, 쏟아질 정도로 많이 쌓였기에. 정리도 하고 썰도 풀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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