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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Apr 30. 2024

사라지면 무용해지는걸까?

썰의 재료

스크랩북 제작에 열을 올리던 가을날, 동네 문구점을 찾았다. 초록색 원통에 노란 뚜껑의 풀을 사려했다. 그런데 S사에서 출시한 보라색 풀이 눈에 들어왔다. 풀칠하는 면이 보라색으로 색칠되어 눈에 잘 보이기에, 풀이 손에 묻어나는 걸 방지하면서 풀칠도 꼼꼼하게 할 수 있단다. 놀랍게도 풀이 다 마르면 보라색이 투명해진다고 한다. 흔적도 없이.


A와 B를 붙인다는 목적을 달성한 뒤에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니! 풀칠을 한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를 제대로 분별하기 힘들어 손끝에 풀 기운을 진득진득 질척 질척 묻혀대는 기존 풀들과는 확실히 다르겠군.


이번 풀은 저거다 싶었. 집에 돌아와 곧바로 사용해 보았다. 도구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작업 속도가 배가 되었다(연장빨을 무시 못 한다). 덕분에 스크랩의 즐거움에 푹 빠졌다. 정신을 차리고 기지개를 켰을 땐 억 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등을 숙여 작업하는 데 몰입한 후였.


진한 보라색을 뽐내다가 소리 소문 없이 투명해지는 풀이 마구 뛰놀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오늘의 작업을 성공리에 마친 김에 선보이는 세리머니 같은 거였죠. 진득한 풀 기운과 보랏빛 존재감이 싹 사라졌요(아아 그는 좋은 풀이었습니다!).


찬양도 잠시, 서글퍼졌. 보라색이 목적을 달성하고 별다른 작별인사도 없이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불현듯 여러 생각이 스쳐갔죠. 있다가 없어지는 것, 피어나서 지는 것, 강력하다가 노쇠해지는 것, 향기롭거나 고약했다가 흩어지고 부서져 무덤덤해지는 것, 태어나서 죽는 것... 보라색과의 헤어짐은 소멸을 생각하게 했.


'사라지면 무용해지는 걸까?'


그때 스크랩북에 찰싹 붙어 있는 여러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라색이 투명해지기 전에, 보라색이 보라색이었을 때, 열심히 붙여놓은 것들이었. 여행지의 팸플릿, 친구가 준 엽서, 지하철 티켓, 기념품 스티커... 따로따로 놀던 것들이 스크랩북이란 큰 그림의 조각조각이 되어 이쁘게 배열되어 있는 모습이 평화로웠다.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남아 있었다.

보라색의 흔적, 에너지, 역사가.


어쩌면 주변이, 삶이 보라색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더 이상 섭섭하지도 외롭지도 않았.


추신: 아아 그는 좋은 풀이었습니다! 이제 그 풀을 보내주려 합니다(다 썼기도 했고). 재구매 의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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