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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May 07. 2024

그러지 않고서야

봉쥬르: PAGE 8-9


갑자기 분위기가 확 달라지네. 메르씨(Merci) 하나만 읽고서 이번 페이지의 주인공은 프랑스인가 싶다고? 잘 봐봐. 불어만 적혀 있는 게 아니야. 폴란드 바르샤바, 프랑스 파리와 지베르니, 이탈리아 밀라노가 뒤섞여 있어. 아마 이 페이지를 장식할 때 주인장은 스크랩 재료들의 톤 앤 매너(tone and manner)를 염두에 두었나 봐.



'톤 앤 매너를 맞췄으면 좋겠어.'


매거진 리더십 코리아에서 주인장이 기자로 활동할 때 처음 들었던 말이야. 어느 한 교열 기자가 매거진에 실리는 기사들마다 개성이 워낙 강하다 보니 매거팀으로서의 방향성과 분위기가 흐려지는 것 같다며 걱정을 표했대. 그러면서 일관성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자면서 각 기사들의 대표 이미지 색상이나 문체들을 비슷하게 맞추자고 제안했지.


주인장은 그 기자의 제안이 이해가 가면서도 아쉬웠대. 또렷한 지향점만을 강조하다가 각 기사들이 뿜어내는 개성과 취향이 묻히진 않을까 했거든. 그러다가 결국에 팀을 지원하는 단체의 입맛에 맞게만 기사를 기획하고 쓸 것만 같았대. 그 단계에 다다르면, 내가 쓰는 재미보단 내가 써야 한다는 책임 쪽에 무게가 실리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고 하더라고. 기사의 이미지 홍보물의 디자인을 비슷한 느낌으로 설정하는 거야, 조금 더 유연히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문장의 끝맺음이나 길이, 형용사 사용의 빈도수까지 조절하고 맞추려는 건 과하게 느껴졌지.


다행인 건, 이런 걱정을 하던 게 주인장뿐만이 아니었단 거야. 동료 기자들은 이전처럼 자율성이 보장된 상황에서 자유롭게 기사 주제와 매거진의 월간 테마를 논하길 원했지. 불행(?)인 건, 결국 교열 기자의 제안이 묻혔고, 기자들은 매 회의 때마다 팀 정체성을 논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는 거. 톤 앤 메너에 관한 대화를 없는 셈 치니까 계속해 마땅한 결론 없이 팀 정체성에 관한 대토론을 벌이게 되더래. 기자들이 말한 자유로운 글쓰기, 재미난 글쓰기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었어.



다시 오늘의 페이지를 봐줘. 말했듯이 여행지도, 스크랩된 자료들의 종류도 제각각이야. 그런데 어우러짐이 나쁘지 않아. 앞선 독일 페이지와는 다르게, 좀 더 여리여리한 폰트들과 이탤릭체, 연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가득한 색, 바스락거릴 정도로 얇은 종이. 그런 것들이 돋보여.


여백이 돋보이는 바르샤바 미술관의 입장권(왼쪽 페이지 좌측 상단 코너) 옆을 로맨틱한 피아노 선율의 대가, 쇼팽이 채워주고 있지. 미술과 음악이 자리를 선점하자 옆으론 파리의 식당(Le Christine)과 카페들(Pinson)이 끼어들고. 거기에다가 낭만과 화려함을 더하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발자취를 간직한 오랑주리 미술관과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의 입장권이야. 아름다운 것을 논하는 김에 귀족 예술의 장이었던 파리 오페라 극장의 입장권도 함께 붙여 두었어. 어때, <오페라의 유령> 팬텀이 가면무도회를 열 법한 규모지?  


좀 더 멀리서, 파리를 구경하고픈 마음에 샹젤리제 끄트머리 또는 시작점에 우뚝 선 개선문 위로도 올라가(오른쪽 페이지 가운데 초록 팸플릿). 그러다가도 두 발로 걸으면 서시테 섬 주변을 돌아. 영화 속에서 자주 보였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에 들러 노트 한 권을 사지. 체력의 한계를 느낄 즈음엔 가방 한편에 수북이 쌓여만 가는 파리 메트로 1회권을 주저 없이 발권해. 티켓 발권기 버튼이 하도 많아서 오랫동안 기계 앞에 서 있던 적이 많았는데, 다음번에 파리를 가면 조금 더 익숙하고 멋지게 발권할 수 있으려나?


페이지를 거의 다 채운 것 같지만 아직 오른쪽 페이지의 여백이 남아있네. 기왕이면 프랑스 옆 나라인 이탈리아 걸 붙이기로 해. 그 편이 스크랩북의 흐름을 따라가기 좋을 듯해서 말이야. 당시 가본 곳이라곤 밀라노 뿐이어서 관련 자료들을 몇 개 붙이지. 나중에 페이지를 읽다가 헷갈릴까 봐 메모도 몇 개 추가해. '이 티켓은 밀라노에 갔을 때, 안젤라와 함께 걸었던...' 하면서.


다르지만 비슷한 것들이 한 데 모여 에너지와 리듬을 만들어냈어. 주인장도 모르게. 그런데 모든 여기 붙인 사람은 주인장이거든. 그렇다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주변 요소들 간의 어우러짐을 선호하는 걸까? 그래서 풀칠을 하고 마스킹 테이프를 붙이고 삐뚤빼뚤 메모를 해가면서 요소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잊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 그런 거라면 그때 그 교열 기자의 제안이 터무니없진 않았던 건가? 그땐 왜 그렇게 강압적으로만 들렸을까, 그 제안이?


그때의 주인장은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정해두었던 걸지도 몰라. 그 무언가 주변에 금을 그어놓고 누가 금을 밟나 안 밟나 살필 정도로 날을 세웠을지도. 아끼는 마음에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고 시야가 좁아지고, 날카로워졌던 걸지도 몰라.


그런데 주인장, 그때 그 교열 기자는 그냥 "같이 만들어 가봐요!" 하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 조각들이 이렇게 한 페이지에서 연결될 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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