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12 23:40 씀
어제 내렸던 비는 어린이 손에 들렸던 미술시간 지우개를 닮아서
넓고 높은 하늘에서 가볍게 방울방울 떨어져 나와서
어깨 위마다 바지 밑단마다 울컥하는 자국을 남긴다
그러더니 오늘은 마법처럼 사라져 있다
어린이 옆에서 수북이 쌓인 지우개똥을 쓸어 담던 손바닥은
미술실을 지키던 어른의 것이었는데
굳은살이 군데군데 박인 모습이 어제는 물론이고
그 전날 그리고 또 그 전날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사한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린이는
어른에게 지우개가 닳고 비가 내렸던 자리를 자랑하느라
열심히 그렸던 그림을 보여주느라
어제의 날씨를 까맣게 잊었다
어린이는 오늘의 날씨를, 머리 위로 드리우는 햇살을
어서 그리고 싶다고 그려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고
어른은 어린이를 잠자코 지켜보고
반짝이는 별 보듯 관찰한다
기상예보가 딱 들어맞을지 아닐지 하는 고민은 어른의 것이다
어른의 손바닥엔 아직 울컥하는 자국이 남아있으니까
예보가 맞고 틀리고랑 상관없이 오늘도
지우개똥 산이 하나 둘 세워지고 허물어지고 어린이와 어른 모두 성장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