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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Oct 24. 2024

20화. 발견하다

갈매기 마을 이야기

  스승님 댁이라 해도 남의 집인 건 여전했기에 조각가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지. 여전히 평상에 앉아 있었어. 시야를 어둠으로 삼키고 있으니 갈매기 마을의 고요함도 함께 삼킨 기분이었지. 그 와중에도 보이는 건 있었어. 눈꺼풀이 차단한 어둠이었지. 어둠의 풍경은 의외로 따뜻했어. 연한 살구색 아침 햇살을 바탕으로 깔고 있었고, 그 위로 검은 모래가 흩뿌려져 있었어. 살구색은 은은하게 검은 입자에 꼼꼼히 덮여 있었지. 꼭 갈매기 마을의 아침햇살을 닮았었대.


  조각가는 어둠의 풍경을 만끽하기로 했어. 그러자 온몸을 휘감는 바닷바람이 느껴졌지. 코 평수를 늘려가며 바람을 크게 들이마셨어.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바람은 시치미를 잘 떼었어. 간밤의 소란스럽고 거친 언행은 어딘가에 싹 숨겨놓고 소금기 어린 부들부들함으로 코끝을 간지럽혔지. 바람치고는 상당히 얄미웠어. 하지만 그 바람이야말로 조각가가 갈매기 마을에 정을 붙일 수 있던 첫 번째 계기였지. 바람이 부는 곳 근처엔 해변이 있었고, 바닷가엔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갈매기가 있었으니까.


  ‘내가 어쩌다 이 마을에 익숙해졌더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어.


  바람이 실어 나르는 이 감각! 냄새도 향기도 아닌 감각의 근원지는 어디인가? 물이다.

  기억에도 없는 태아 시절의 환경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편안하고 의지할 수 있는 물질이다.


  갈매기 마을의 물은 바다의 것을 육지로, 육지의 것을 바다로 옮기며 산다.

  그 물 근처에 가면 나는 맨발로 걸을 수 있다. 평소 보이지 않던 발을 마음껏 자연에 내버려 둘 수 있다.


  모래는 유별나게 다정하다. 꼴사납게 양말 속에서만 놀게 했던 내 두 발도 보듬을 정도로.

  모래만큼 다정한 생명이 모래 주변에 산다. 물과 모래 주변에서 내게 날아온다.

  매처럼 쏜살같이 달려들다가도 발등 위엔 함박눈처럼 내린다. 날개 달린 생명을 발등에 이고 간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생각인지 명상인지 모를 연상이 계속되었지. 꼭 꿈자리 같았어.


  생명에게 내 발등은 둥지와 같다.

  생명은 둥지 위, 발등 위, 내 치부 위, 엉덩이를 문질러 앉을자리를 아늑하게 만든다.

  다도 하는 여성의 무릎처럼 발을 가지런히 모은다.

  어이. 거긴 내 발이야. 그런 내가 결코 버릴 수 없는 우락부락한 도구라고.

  인간은 땅을 걸으며 사는 생명이야. 인간에게 발은 무척이나 중요한 거라고.

  네가 앉은자리가 그런 자리라고.


  너에겐 날개가 있잖아. 방금 내게 왔던 것처럼 날아갈 수 있잖아. 굳이 그곳이 아니어도 되잖아.


  (…)


  네가 내게 온 이유를 그래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란다.

  너와 함께 다니면 더 이상 외롭지 않구나. 더 이상 외지인, 구경거리 취급을 받지 않는구나.

  네가 덮어준 건 내 발등, 내 치부뿐만이 아니구나.


  날개 달린 생명은 인간과 함께 할 때, 날개 달린 생명이 도리어 인간을 따라 걷는구나.

  나는 내가 너의 날개 아래에 탑승이라도 하고 날아오를 줄로만 알았는데.


  (…)


  네가 나를 위해 땅 위를 걸었듯이 나도 너를 보호하려 했다. 애를 썼지. 예를 들어 말이다, 모래사장 위라면 몰라도 아스팔트처럼 표면이 울퉁불퉁한 길에선 예외 없이 너를 품에 안았단다. 물갈퀴에 육지의 건조한 마찰력이 더해지면 아무래도 아플 것 같더구나. 탑탑탑탑 하는 네 발소리가 어느 반려견의 발자국과도 겹쳐서 들릴 때도 있었지. 하지만 아무래도 내겐 상처가 덧나는 소리 같아 신경이 쓰였단다. 내가 너를 들어 올려 가슴에 안고 걸을 때마다 너는 아무런 저항 없이 내게 안겨 있었지. 최소한 발버둥 치지 않았으니 네 나름대로 나의 방식에 동의한 거로 생각해도 되었겠지.


  그런데 좀 애를 덜 쓸 걸 그랬다. 너와 걷는 게 소중해지는 바람에 두려움도 커졌구나. 네가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게 조각하겠다는 꿈에 비바람이 들이닥쳤구나. 나는 계산이 빠른 사람이 못 되는구나. 꿈자리와 꿈 밖의 자리를 쉽게 구분할 만큼.


  조각가는 갈매기가 공원에서 취했던 포즈를 따라 해 보았지. 그런데 두 팔만 벌렸지, 승리보다는 그 반대의 결과를 맞닥뜨린 사람 같아 보였어. 힘이 없어 보이는 걸 넘어서 무언가 제대로 꺾인 듯한 에너지였지.


  그래, 두 눈을 감으니 확실히 보이는구나.


  나는 너를 놀라게 하고 다치게 해서라도 너를 땅에 묶어 두고 하늘과 물의 삶을 나눠 가지려고 했구나. 뮤즈라 찬양하면서 조각상의 부품으로만 너를 이용하려 했구나. 그런 나를 너는 그저 믿었구나. 시도 때도 없이 덮어주었구나.


  이윽고 조각가의 생각은 지난날 어둑어둑해진 바닷가 위를 걷고 있었어. 맨발 차림으로 울적한 모래사장 위를 걷기 전에 내던지다시피 했던 우산이 떠올랐지. 현서를 데려다줄 때 이마에 걸치고 온 우산은 평소 조각가가 잘 챙기지 않는 것 중 하나였어. 지금껏 비가 오면 발등 위 갈매기, 복숭아뼈 주변을 걷는 갈매기를 손으로 훅 들어 올려 품에 안고 달리기 바빴거든. 매번 그렇게 비를 피했거든. 그때마다 양손이 갈매기를 꼭 붙들고 있어야 했으니, 장우산을 들 여유는 없었지. 빗물에 젖어도 괜찮았지. 갈매기가 조각가의 우산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빨리 움직여야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으니까.


  조각가는 자신의 의무가 갈매기를 비 피할 곳으로 갈매기를 이동시키는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결국에 비를 피한 건 갈매기가 아닌 조각가가 아니었을까?


  너는 내게 우산이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난 너에게 우산을 씌우려고 애를 썼구나. 너무 애를 썼구나.

  그래. 내가 어젯밤에 놓고 온 것은 우산이었구나.


  어둠의 풍경에선 살구색 기운이 희미하게만 느껴졌다고 했잖아. 그 수줍고 붉은색이 조각가의 동공으로 들어왔어. 반죽을 빚던 손등에도, 갈매기를 안던 가슴팍에도, 모래 위를 누비던 발에도, 드리웠지. 조각가는 아침 햇살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어. 비를 쫄딱 맞고 난로 앞을 떠나지 않는 생명처럼 한동안 그렇게 빛을 향했어. 그러다 조각가는 벌떡 일어서더니 두 눈을 뜨고 골목길로 달려 나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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