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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Oct 24. 2024

19화. 수습하다

갈매기 마을 이야기

 한낮이더라도 주인 없는 방엔 햇볕이 들지 않는 법이지. 조각가가 머물던 창고도 마찬가지였어. 폭풍우의 그림자가 걷힌 이른 아침이었지만 여전히 어둑어둑했지. 꼭 그곳에만 해가 뜨지 않은 것 같았지. 하숙집 아주머니는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발을 동동 굴렀지. 책임감이 발에 무게 추를 달아두었기 때문이야. 작업을 된통 방해한 것도 모자라 갈매기에게 그걸 들키고, 갈매기를 매우 놀라게 하고, 결국 갈매기를 집에서 나가게 해 버렸잖아. 평소 걸어 다니기만 하던 갈매기 녀석이 다친 날개를 휘적이면서까지 날아올라야만 했다는 사실에, 그 정도로 자신이 갈매기를 겁줬다는 생각에, 죄책감도 따라왔지. 간밤에 조각가가 돌아오진 않았지만 진실 공방이 늦춰진 것일 뿐, 언젠가 돌아와 조각가가 이 사단을 보고 화를 낼 게 분명했지.


  제아무리 평소 점잖았던 조각가도 신경 쓰던 것 두 가지, 작업과 갈매기가 모두 망가진 상황에선 더 이상 예의를 차리지 못할 것 같았지. 어른이자 집주인이 되어서 도움이 되기는커녕, 의심하고 괜한 호기심을 갖고 우월감을 조금 누려보려다가 사고를 치다니. 금귤 아주머니의 달콤한 제안은 온데간데없고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만 남았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치면서도 날아오른 갈매기를 붙잡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첫째, 조각가의 친구이기 이전에 자연의 일원이었던 갈매기가 자연스러운 상태로 회복할 수 있음은 반길 일이었으니까. 설령 그 회복이 억지로 이뤄진 거라도 회복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테니 말이야. 둘째, 하숙집 아주머니의 시선을 피해 창고 밖으로 나가는 갈매기의 움직임엔 망설임이 없었어. 간절함이 돋보였지. 갈매기 녀석은 늘 조각가의 곁을 지켰으니깐 집을 나가는 그 순간에도 조각가를 찾아가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여기 웬 침입자가 나타나서 당신의 작품을 방해하고 있어요,’ 하고 경고를 하려는 거였을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더라도,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조각가에게로 날아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조각가도 갈매기도 집을 나갔지만 어디선가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서로를 향해 날고 있지 않을까 싶었지.


  ‘갈매기라면 어떤 상황에서건 조각가가 있는 쪽으로 날겠지.’


  그렇게 따지면 이제 정말 문제는 조각상이었어. 찰흙 반죽 같은 형태가 쉽게 뭉개지고 부서졌던 걸로 보아서 그게 분수대 위에 올라갈 최종 완성본, 석상은 아니었겠지만, 조각가가 몇 날 며칠 공을 들여서 작업하고 있던 거라는 것만큼은 확실했지. 하숙집 아주머니로서는 자신이 창고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 물건이 망가져 있었는지 알 턱이 없었기 때문이었지. 그런데도 조각가의 물건이 망가진 게 오롯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 침입자의 마음이었지.


  ‘광장에서의 분수대 개수식 일정은 정해져 있을 텐데. 나 때문에 괜히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어쩌지. 이걸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때였어.


  “아주머니!”


  변명 아닌 변명을 준비하는 하숙집 아주머니의 앞에 책가방을 멘 채로 삼거리에서부터 달려온 현서가 모습을 드러냈지. 갈매기가 문을 박차고 나간 다음이라 활짝 열려 있는 창고 문 뒤로 현서가 바로 보였어.


  “아니 너, 저기, 그 이건 말이다, 아니, 아저씨는 지금 집에 없…”

  “아저씬 지금 할아버지 댁에 있어요.”

  “조각가 선생이 거긴 왜?”

  “그보다, 곧 있으면 금귤 아주머니가 올 거예요! 그전에 제가, 히익!”


  하숙집 아주머니 등 뒤로 보이는 작업실 풍경은 한눈에 보기에도 처참했지. 폭풍우가 이 집 창고 내부만 휩쓸고 갔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어. 어수선하지만 나름의 체계가 잡혀 있던 작업대 위에는 굳어서 뾰족하게 조각난 조각 반죽과 아직 덜 굳었기에 말랑한 채로 서서히 굳어가는 조각 반죽이 뒤섞여 있었지. 늘 칼각으로 정돈되어 있던 조각가의 침대도 엉망이었어. 베개와 이불이 바닥에 나뒹굴고 갈매기가 침대처럼 쓰는 천들도 마구 흐트러져 있었지.


  “그러니까 이건 말이다…….”

  “갈매기는요?”

  “녀석은… 날아서 밖으로 갔단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사실만을 말했지. 굳이 정황을 현서에게 모두 말할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했지. 어린아이에게 미주알고주알 얘기했다가 괜히 오해를 사면 어쩔까도 싶었고.


  “아저씨 말이 진짜였네요. 날 수 있구나!”


  갈매기가 날았다는 증언에 현서가 눈을 반짝였어. 하지만 금귤 아주머니는 현서가 아까 말한 게 더 신경 쓰였지.


  “금귤이가 지금 여기로 오고 있다고?”


  그건 좀 성가실 거라고 생각했지. 하숙집 아주머니가 조각가가 외출한 사이에 창고에 들어간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아주머니, 갈매기는 다쳤잖아요. 그래도 날았어요?”

  “넌 알고 있었던 거냐?”

  “저 혼자 여기 들어와서 문을 잠갔을 때요. 친구들도 따라왔던 그때. 그때 봤어요. 날개를 다쳤대요. 악몽 때문에…….”


  하숙집 아주머니는 갈매기의 상처에 관해 알고 있는 이가 자기 혼자가 아니란 사실에 괜히 마음이 놓였지. 하지만 그런다고 망가진 조각 반죽이 다시 합체되거나 하진 않는다는 생각에 다시 시무룩해졌지.


  “갈매기가 오랜만에 나느라 방이 이렇게 된 건가요?”

  “사실은 말이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자초지종을 다 털어놓았지. 염탐의 계획과 실행, 그리고 실패까지 전부 다. 현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업실 내부를 틈틈이 살폈어. 괜히 작업대 주변의 반죽 파편들을 손바닥으로 긁어모으고 청소를 했지. 그러더니 대뜸 가방에서 검은 봉지를 하나 꺼냈어. 하숙집 아주머니가 이실직고를 다 한 뒤였지.


  “아주머니, 이거 받아주세요.”

  “이게 뭐니?”

  “지점토예요. 제 미술 숙제인데 잠깐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봉지는 동그랗게 말린 무언가의 모습을 닮아 있었지. 멀리서 보면 잘 빚은 왕만두 갖기도 했어.


  “갈매기는 평소에 아저씨 침대 옆 저기 저 지푸라기 말려 있는 저 위에서 빨간 체크무늬 수건을 덮고 자요. 이걸 그 아래에 넣어두고 갈매기인 척 꾸밀 수 있을 거예요. 금귤 아주머니가 갈매기가 집 나간 걸 모르게 할 수 있을 거예요. 금귤 아주머니가 갈매기의 가출을 몰랐으면 한다면서요.”


  하숙집 아주머니는 현서에게서 검은 봉지를 넘겨받고 어안이 벙벙했어.


  ”현서야, 잠깐만, 어디 가려는 거니? “

  “저는 갈매기를 찾아올게요! 그동안에 아주머니가 부서진 조각 덩어리를 어떻게든 잘 매만져 주세요!”

  “현서야, 잠깐만, 그러니까 금귤이가 온다는 얘긴 어디서 들은 거고?”

  “아주머니만 믿어요! 할아버지가 아주머니도 미술 성적이 아주 좋다고 했어요!”


  금귤 아주머니에 이어 현서도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알쏭달쏭한 말만 내뱉고 사라졌어. 하지만 손에 쥐어진 지점토 봉지 덕분에 한 가지는 확실해졌어. 갈매기가 집을 나갔다는 걸 금귤 아주머니에게 안 들킬 수 있었지. 갈매기가 사라졌다고 하면 보나 마나 동네방네 소문낼 게 뻔했거든. 모델이 사라졌으니 분수 조각 작업은 대실패라며 호들갑을 떨 게 분명했어. 하숙집 아주머니는 지금이야말로 어른답게 세입자를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지.


  금귤 아주머니의 경운기 엔진 소리가 마당 앞에 크게 울리기 전까지, 하숙집 아주머니는 간밤의 소동이 티 나지 않도록 조각가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갈매기 대용품을 비치하고 작업대 위를 멀끔히 치웠어. 그리고 몇 안 남은 반죽 조각을 손으로 주물럭주물럭하기 시작했지. 비상 상황인 만큼 하숙집 아주머니의 낡은 도구들도 동원되었어. 창고 깊숙이 숨겨 놨던 조개껍데기 상자가 열렸지. 자개 공예용으로 곱게 빻아 놓은 조개껍질들에선 쏟아지는 무지갯빛이 창고 안의 태양처럼 빛나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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