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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Oct 24. 2024

18화. 돌아서다

갈매기 마을 이야기

  스피드 레이서인 금귤 아저씨도 좁고 복잡한 시골길에선 벌벌 기었어. 덕분에 현서는 멀리 가지 않아서 금귤 아저씨의 미니 트럭을 불러 세울 수 있었지. 트럭이 멈춰 서는 걸 보고서야 잠시 멈춰 서서 백팩의 어깨끈을 움켜쥐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어. 금귤 아저씨는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밖으로 빼고선 현서를 되돌아보았지.


  “여름학교 가는 길이지? 할아버지가 아까 말해 주었는데 왜 안 오나 했다. 타라.”


  현서는 평소 금귤 아저씨를 무서워했어. 서글서글하게 잘 웃는 아저씨였지만 웃을 때가 아니면 늘 입을 퉁명스럽게 꾹 닿고 있었거든. 그때 금귤 아저씨의 눈썹이 미간 쪽으로 상당히 긴장감 있게 모였는데, 그게 엄청 심각한 분위기를 풍겼지. 게다가 금귤 아저씨는 늘 어디서나 짬이 나면 가방이나 주머니에서 달그락달그락 외국산 조개껍데기를 꺼내 이리 보고 저리 보다가 맥가이버 칼로 쿵 잘라도 보고 길에 놓인 돌로 쾅 찧어도 보고했거든. 그 모습이 집 지키는 개처럼 성나 보였어. 수다스러운 현서도 금귤 아저씨 앞에서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지. 그런데도 오늘처럼 이렇게 금귤 아저씨네 트럭에 올라탈 수 있던 건 금귤 아저씨와 가까이 지내는 이장님, 할아버지 때문이었어. 금귤 아저씨라도 이장님 옆에 있을 땐 잘 웃었거든. 틈만 나면 이장님의 흠을 잡으려고 눈을 날카롭게 뜨고 있는 금귤 아주머니와는 딴판이었지. 둘이 어떻게 같이 살고 있는지, 참 미스터리였어.


  “언덕 올라서 정문 앞에 세워주랴?”


  현서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어. 금귤 아저씨는 다시 액셀을 밟았지. 그때 전화 벨소리가 울렸어. 금귤 아저씨의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은 ‘마누라,’ 곧 금귤 아주머니였어. 금귤 아저씨는 현서 쪽으로 고개를 돌려 “쉿!” 고 검지를 치켜들더니 잠깐 전화를 받겠다고 언질을 주었어. 그러곤 곧바로 통화에 응했지. 스피커폰이 아니었는데도 조수석에 앉은 사람에게 통화 내용이 고스란히 들릴 정도로 통화음이 컸어. 현서는 전화를 건 사람이 금귤 아주머니란 사실에 귀를 쫑긋했어. 괜히 현서가 가는 곳마다, 관심을 두고 애정하는 것마다, 흘겨보는 사람이란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긴장을 한 거야. 금귤 아저씨의 핸드폰 스피커로 금귤 아주머니의 앙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어.


  “오늘 왜 이렇게 일찍 나갔어요?"

  “어, 그, 마을에 볼 일이 좀 있어서.”


  이장님 부탁으로 새벽같이 트럭을 끌고 나갔다고 그대로 얘기했다간 한 소리 들을 것 같았나 봐. 금귤 아저씨는 괜히 말을 돌렸지. 그런데 그 대답이 금귤 아주머니의 허영심을 또 부추겼어.


  “아유, 역시, 당신은 역시 천상 이장감이에요. 이렇게 마을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이 어디 있대요. 학력 믿고 이장하는 누구랑은 차원이 다르다니까. 그 사람이 한 게 벽돌길 깔고 광장 다듬는 거 말고 뭐가 있나요. 막상 먹고사는 문제 해결은 당신 같은 사람이 발품 팔면서 다 해내고 있는데.”


  전화 통화였는데도 어쩐지 금귤 아주머니의 진득한 입김이 현서에게까지 와닿는 느낌이었지. 금귤 아저씨는 시큼한 무언가를 혀끝으로 맛본 사람처럼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만해, 그런 거 아니야.”라고 말했지. 현서는 별로 엿들을 만한 게 없나, 하고 고개를 차창 밖으로 돌리려 했지. 그때, 금귤 아주머니 쪽에서 화제를 바꿔 말했어.


  “나 지금 형님네 가는 길이어요. 어제 우리 한참 염탐 중이었거든요? 조각가 양반 작업실 쪽을?”


  금귤 아저씨는 조각가라는 말에 현서가 쫑긋하는 걸 눈치챘지. 하지만 딱히 통화 음량을 줄이지도 않았고 그대로, 마치 현서 들으라는 듯이 통화를 계속했어.


  “염탐이라니?”

  “근데 들어봐요, 형님이 아무 말 없이 나랑 영상 통화까지 하다가 전화를 툭 끊어 버린 거 있죠. 그 광장에 들어설 작품이 뭐 어떻게 생겼는지 좀 알려주면 어때서 그러나, 형님도 영 무른 사람이라 그런지 소심한 사람이라 그런지, 우물쭈물하다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거 같더라고요. (…) 그래, 그건 그렇다 쳐도, 근데 그 뒤로 나한테 일말의 사과 문자나 전화도 안 하는 거 있죠? 그래서 지금 따지러 가는 김에 다시 한번 고 작품이란 거 좀 살펴볼라고요. 뭔가 전화 끊길 때 큰 소리가 난 것도 같아서, 형님이 또 넘어지거나 그런 건 아닌지 걱정도 조금 되기도 하고. 뭐 겸사겸사이지 않겠어요?”

  “트럭은 내가 갖고 나왔는데 거기까지 걸어가려고?”

  “이전에 우리 금귤 실어 날랐던 경운기 있죠? 그거 타고 갈랍니다.”

  “당신 그거 잘 다루지도 못하잖아?”

  “경운기로 이동하는 모습이 좀 더 서민 친화적이잖아요? 미래 이장님의 안사람으로서 기왕이면 땅에 가깝게, 바람 술술 맞으면서 다니면 이 집 저 집 인사도 하고 좋지 않겠어요?”

  “말했지만, 난 이장이니 뭐니, 관심 없어. 당신 제발 그 꿈은 접고 사업에 같이 집중하자고.”

  “마을의 이미지를 한껏 끌어올려준 사업을 했으니, 이젠 우리 스스로가 마을의 이미지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뭐. 하여튼, 형님한테 갔다 와 볼게요. 우리 미래의 이장님은 오늘도 정치를 잘하고 오셔요.”


  콧소리 가득한 목소리를 끝으로 금귤 아주머니가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어. 금귤 아저씨는 어이가 없다는 듯 전화기를 한번 내려다보고 조수석 옆의 현서를 살피고 다시 운전에 집중했지.


  “본인이 툭 끊은 전화는 생각도 못 하고 남이 자신의 전화를 툭 끊은 것만 기억하다니…….”


  현서는 금귤 아저씨의 말이 혼잣말인지 자신을 향해하는 말인지 구분이 가질 않아 그저 가만히 앉아 있기로 했어. 그러는 사이 트럭은 읍내의 삼거리로 진입했지. 한쪽은 바닷가로, 한쪽은 조각가 아저씨의 하숙집이 있는 방향, 그리고 다른 한쪽은 학교 쪽으로 가는 길이었어.


  “어디 보자, 학교는 이쪽이었지?”

  “아저씨,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여기서부터 혼자 갈게요. 친구들이 갑자기 트럭 타고 오는 거 보기라도 하면 또 귀찮게 질문하고 그럴지도 몰라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현서에겐 다른 계획이 있었어. 방금까지 대놓고 들어버린 금귤 아저씨와 아주머니 간의 통화로 결심한 거였지. 조각가가 자신을 업고 작업실을 나온 사이,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일을 금귤 아주머니보다, 정확히는 금귤 아주머니의 경운기보다 먼저 가서 확인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지. 하숙집 아주머니에 대한 인상은 금귤 아주머니에 대한 것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에, 설령 하숙집 아주머니가 금귤 아주머니의 이른바 염탐 계획에 동조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믿을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어. 혹시 무슨 일이 생겼더라면 정황을 잘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도 조금 있었지. 조각가와 갈매기의 친구로서 가질 수 있는 일종의 긍지였지.


  “하지만 여기서부터 걸어가려면 정문까지 언덕 오르기 힘들지 않겠니?”

  “괜찮아요. 매일 걷는 길인걸요.”


  현서는 그새 안전벨트를 풀고 트럭 문을 열고 있었어.


  “네가 정 그렇다면야. 수업 잘 듣거라.”


  금귤 아저씨의 트럭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현서는 학교 반대 방향으로 뛰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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