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지기 비하인드 에세이
예뻐하는 것에 관한 글쓰기는 최대한 미루는 편이다. 결심 끝에 글을 쓰기 시작했더라도 그를 향한 애정이 실시간으로 쌓이는 상황이라, 그와 관련된 “최상의 (가장 신선한)” 애정 표현을 글 속에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
우리는 책으로 엮이기 전의 이야기들을 프로젝트라 불렀다. 그중 처음인 '프로젝트 기역(ㄱ)'을 운영하면서, 지음지기는 “선 온라인 연재, 후 독립출판 작업”이라는 출판 프로세스를 만들어냈다. 우리 팀만의 독자적인 것은 아니었고, 우리 나름대로 시스템을 정했다는 뜻에서.
각자의 공간에 지음지기를 들였다. 나는 브런치, 정연이는 네이버 블로그에 별도의 매거진/게시판을 만들어, 서로에게 보내는 글과 그림을 업로드했다. 지음지기 웹페이지를 하나 제작해서 그곳에 지음지기의 콘텐츠를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하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었지만, 나와 정연이가 편지처럼 주고받은 글과 그림의 느낌을 살리려면 독자를 번거롭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이트와 사이트, 매거진과 게시판, 쓰는 사람의 공간과 그리는 사람의 공간을 돌아다니는 독자를 글과 그림의 편지를 전하는 우편배달부 삼기로 한 거다. 그로 인해 독자가 조금이라도 우리 두 사람 간의 대화에 몰입할 수 있었으면 했다.
아직 책이란 물성을 지니지 않은 이야기들, 브런치와 블로그의 데이터로 존재하는 이야기들, 편집과 퇴고 과정을 많이 거치지 않은 이야기들, 그런 원자재(raw material)를 인터넷에 떡하니 올려놓다니. 겁이 없었다. 혹 지음지기의 책을 읽은 분들이 그 원자재를 찾아 읽는다면 편집 과정을 거친 글과 그림이 처음과 얼마나 다른지 비교할 수 있을 거다(마니아만 즐길 수 있는 그 쏠쏠한 재미를 무시할 수 없어, 지금까지도 그 원자재들을 인터넷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나중엔 지우고 싶어질 수도 있겠지만.).
온라인 연재는 이제 막 팀을 꾸린 지음지기에게 필요한 장치이기도 했다. 한 주, 두 주 지날 때마다 글과 그림의 탑이 높아져가는 게 보이는 시스템이었기에, 일하는 티를 내기에도, 일하고 있다는 감각을 잃지 않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콘텐츠를 만들 때에도 양보단 질이 우선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어느 정도 두께 있는 책등을 가진 책을 만들기 위해선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성과를 내고 싶었다.
처음은 어렵다.
처음이니까. 안 해 봤으니까. 서툰 게 티 나기 쉬우니까.
처음은 소중하다.
처음이니까. 한 번뿐이니까. 서툰 게 티 나지만 진심이니까.
마음을 다잡는 덴 이만한 주문이 없었다. 그렇게 첫 번째 겨울을 보냈다. 아파트 앞 목련나무가 슬쩍 봉우리를 틔울 때쯤엔 글과 그림이 주고받은 편지를 여섯 통 완성했다.
연재를 마친 글과 그림의 모습은 오묘했다. 밀가루 반죽(브레인스토밍)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지만, 오븐의 열기가 아직 여전했다. 그 열기는 막 만들어져 나온 글과 그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뿌연 기운과 같았다. 창작자의 눈을 가리고 아웅 하는 뜨거움. 그를 무릅쓰고 마구잡이로 글과 그림을 편집하려 했다가는 애써 빚어놓은 모양이 망가지기 일쑤였다. 더욱이 기한을 두고 작업한 글과 그림이라 그런지, 즉흥성(서투름과 진솔함)이란 맛이 잔뜩 묻어났다.
갓 구운 빵을 건조대 위에서 식혔다가 먹기 좋게 썰어내듯이, 우리는 글과 그림의 열기가 가시길 기다리기로 했다. 스스로가 지음지기의 글과 그림을 조금 더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고칠 수 있을 때, 책 만들기 작업을 시작하자고 했다. 편집의 적기가 오기 전까지 할 일은 두 가지였다. 완성한 프로젝트를 포트폴리오에 아카이빙 해놓고, 다음 프로젝트의 기획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기역을 끝냈으니 그다음은 니은(ㄴ), 디귿(ㄷ)이었다.
프로젝트 기역을 마쳤을 땐 겨울이, 니은을 마무리 지었을 땐 봄이, 디귿(ㄷ)을 끝냈을 땐 가을이 지나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계절마다 프로젝트를 하나씩 끝낼 수 있었는데, 그건 나도 정연이도 예상치 못한 속도였다. 정기 온라인 회의와 빡빡한 온라인 연재 일정으로 생각보다 글과 그림의 탑이 높게, 빨리 쌓였다. 탑의 높이가 올라가는 걸 보기 좋긴 했지만, 언제까지나 양적 실험만을 할 순 없었다. 건조대 위로 옮겨 식힌 글과 그림에 책이라는 포장지를 입혀주어야 했다.
2023년 가을, 프로젝트 디귿이 막 끝났을 무렵이었다.
“내년(2024년)에 북페어에 나가보는 건 어때요?" 정연이가 제안했다.
나는 건조대 쪽을 흘깃했다. 제법 지음지기다운 모습으로 식어있는 글과 그림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식었지 꽤 되었는데도 여전히 냄새가 맛있었다. 입맛이 싹 돌았다. 편집의 적기가 찾아왔다.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