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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지음지기 비하인드 에세이

by 프로이데 전주현
내 몸은 여전히 삐그덕거리고 있다. 하지만 이전과 똑같진 않다. 무언가를 결심했고, 그리고 그로 인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늦었다'는 진단은 피할 수 있다고 믿으며 지내기 때문이다. '이전과는 다르게,' 하는 반전을 꾀하는 것을 연말연초에 품는 희망이라고 불러도 좋다. 작심삼일처럼 한없이 연약한 믿음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자유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을 마주했다는 거다. 일상으로 변화를 초대했다. 다들 그렇게 시작하는 거 아닐까? -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 중에서


내가 면밀히 뜯어본 것은 퍼즐이었다. 조각난 것들이 모여 완성할 큰 그림이었다. 그림은 1000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반듯한 상자에 담겨 있었다. 뚜껑을 덮은 채로 상자를 흔들면 사각사각 서걱서걱 쾅쾅, 거센 파도를 만난 배처럼 조각들이 요동쳤다. 거실 바닥에 조각들을 늘어놓으면 소란스러움이 가셨다. 방금 전까지 떵떵대던 파도는 잦아들고 수면 위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뻐끔거리기만 하는 조각들만 남았다. 그림이 있는 면이 하늘을 보게끔 조각들을 하나씩 뒤집어 응급 처치를 했다. 그다음에 나는 뚜껑을 집어 들었다. 퍼즐이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 조각들의 큰 그림이 보였다. 울퉁불퉁한 모서리 자국이 보이질 않는 멀끔한 그림. 그 그림에선 파도 소리도 뻐끔대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닥에 놓인 조각 중 손에 집히는 것을 하나 들어 그 멀끔한 그림 위에 올려 보았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냐고 물으면서 조각과 그림을 번갈아 봤다. 조각의 모서리에 걸친 아주 작은 흔적도 도움이 되었다.


첫 번째 책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원고라 부르는 글과 그림 더미를 책상 위에 늘어놓으며 시작했다. 정연이에게 보낸 글, 그 글에 답장으로 도착한 그림, 내게 정연이가 보낸 그림, 그 그림에 답장처럼 보낸 글. 한 데 모았더니 글이 여섯 편, 그림이 여섯 점이었다. 퍼즐 조각을 하나씩 뒤집어 정리하듯이 글과 그림을 이어 읽었다. 어느 것이 먼저였고 나중이었는지 알았기에 이어 읽는다는 흐름을 자연스레 만들 수 있었다. 그 흐름은 고스란히 첫 번째 책의 목차가 되었는데, 책에서도 명확히 밝혀두진 않았다. 글이 먼저였고 그림이 나중이었는지, 그림이 먼저였고 글이 나중이었는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고 싶었다. 그렇게 글과 그림의 대화가 자연스레 뒤섞였으면 했다. 기왕이면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 헷갈리게 하고 싶었다. 독자들을 뒤흔들어 보고 싶었다(지음지기의 세계에 어서 오세요!). 그만큼 글과 그림의 합이 좋길 바랐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퇴고였는데 가장 나중에 끝난 일도 퇴고였다. 상한 문장은 치료했고 어색한 문장은 일부러 상처 입혀 잘라냈다. 쓰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해하기 힘든 문장은 상냥한 문장으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담은 문장은 조금 불친절한 문장으로 변신시켰다. 완성해야 할 큰 그림, 책의 콘셉트와 원고가 어긋나진 않는지도 계속해서 점검했다. 원고는 수상하리만큼 고치면 고칠수록 좋아졌다. 고친 원고는 인쇄해서 소리 내어 읽었다. 소리 내어 읽는 문장이 눈으로 따라가며 읽는 문장의 속도를 따라가진 못했지만,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버벅대는 부분이 눈으로 읽었을 때도 성가시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질 순 있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문장을 정리했다. 그래서일까, 독자님들 중에서 '책이 내게 말을 거는 느낌이었다,’ '편안한 이야기를 듣듯이 후루룩 읽었다,' 는 후기를 들려주는 꽤 있었다. 하지만 원고는 저자이자 편집자인 내 눈을 가리는 데 이상한 재주가 있었고, 그 재주에 끔뻑 속은 나는 몇 번이고 들여다봤는데도 잡아내지 못한 오류를 책에 고스란히 남기고 말았다(오타 찾으신 독자님들 있으시죠?). 인간적이라 해야 할까, 미숙하다 해야 할까.



퇴고만큼이나 표지 디자인에도 시간을 많이 들였다. 기역, 니은, 디귿 순으로 연달아 프로젝트를 선보일 예정이었기에, 시리즈성이 돋보였으면 했다. 각 책의 주제가 다를지라도 한 데 꽂아 놓았을 때 ‘아, 같은 사람이 만든 책이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면, 지음지기만의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이야기들 간의 유대감을 형성하기에도 좋을 듯했고. 그를 위해 앞표지 상단부와 책등에 01, 02, 03과 같이 숫자를 표기했다. 팀의 정체성과 시스템을 확립할 때 참고했던 펭귄북스의 표지를 레퍼런스 삼았다. 또 앞표지에 꼭 정연이의 그림을 넣기로 했다. 우선, 그림이 이쁘니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고, 표지에 홀려 괜히 책들을 들여다봤던 경험을 떠올리니 그림이 있는 표지가 그렇지 않은 표지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쉬울 거라는 기대가 생겼다. 앞표지 그림은 원고 점검 중 명확해지는 책의 콘셉트와 제목을 고려하여 편집 단계에서 정연이가 새로 그렸다. 덕분에 책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날개가 있는 책을 선호하지만(표지가 붕 뜨지 않게끔 문진 역할을 하기도 하고 책갈피가 없을 때 활용할 수도 있으니) 정연이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굳이 고집하지 않았다. 대신 책이 담아내는 프로젝트의 성격 상, 날개가 있는 편이 콘셉트 전달에 더 적합할 것 같다고 판단되면 날개 있는 표지를 제작했다(두 번째 책 <너와 나의 니은>에는 날개를 넣었다). 뒤표지는 인용구 하나와 ISBN 바코드만 넣어 깔끔하게 처리했는데, 이 또한 정연이의 철학(simple is the best)을 반영한 결과였다. 뭐든 채워 넣고 보는 멕시멀리스 트인 나는 받아들이기 힘든 디자인이었지만, 보이는 부분에 관해선 기왕이면 미술학도였던 정연이의 눈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책을 만들 때 나는 주로 기획자의 입장에서 되든 안되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던지는 편이었고, 정연이는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아무 말대잔치나 다름없었던 그 아이디어들을 정리하곤 했다. 아이디어들의 단가를 계산해 보고선 “그건 안 돼요,” 하며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건 주로 정연이었다. 제동을 걸어주는 이가 없었더라면 절대 책을 완성할 수 없었을 거다. 남들에겐 손쉬운 계산도 몇 분씩 붙잡고 있는 문과생 둘이지만, 나보다 셈에 능한 정연이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그러지 않았더라면, (다시 한번,) 절대 책을 완성할 수 없었을 거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독립출판은 일이 많았다. 기획과 제작, 홍보, 유통까지 모두 도맡아서 했다. 작가인 동시에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가 되어야만 했다. 그 때문에 인디자인 원데이 클래스를 수강했고 어도비 프로그램도 정기구독했다. 핀터레스트에 접속해 시각 레퍼런스를 찾는 일이 많아졌고, 그저 놀러 다니던 동네 서점을 좀 더 면밀히 살피게 되었다(여긴 독립출판물 입고를 받는 곳인가? 이 서점의 분위기가 지음지기의 분위기와 어울리나? 어떤 책들이 가장 잘 나가나? 등등…). 그 와중에 가장 유의해야 할 건 책 만들기를 본격 시작하게 된 계기, 2024 제주 북페어 참가 신청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인스타그램과 브런치, 네이버를 통해 온라인 연재를 선보이고 있었지만, 오프라인에서 (예비) 독자님들을 만나는 건 처음이 아닌가. 그런 자리에 지음지기를 소개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카이빙 작업(노션 페이지 제작)도 시작했다. 팀의 소개문을 작성하고 그간의 작업들을 전시하면서 브랜딩에 관한 고민도 깊어졌다. 설레발이었지만, 혹 북페어에 참가하게 된다면 부스를 또 어떻게 꾸밀까 하는 문제도 남아있었다. 새로운 일이 끊이질 않았다.


글과 그림의 열기를 식히던 시절, 그때가 평화로웠다면 평화로웠다.


N차 퇴고를 마친 원고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 빨간펜을 쥐고서, 글과 그림이 있던 건조대 쪽에서 났을지도 모를 소리, ‘사각사각, 서걱서걱, 쾅쾅’하는 퍼즐 상자 소리를 떠올렸다. 당장은 혼란스럽더라도 나중엔 큰 그림을 완성할 1000 조각, 그 조각에서 나는 소리를 잊지 않으려 했다. 기왕이면 하나씩 조각을 보기 좋게 진열하고서 면밀히 뜯어보고 싶었다.


조각난 그림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 그게 바로 창작자로 살고 싶다 외친 정연이와 나, 지음지기가 해야 할 일이었다. 조각의 모서리가 큰 그림과 부드럽게 들어맞을 때마다 나의 자리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지음지기는 책을 만들어갔다.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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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는 사람 최정연 │쓰는 사람 전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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