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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지음지기 비하인드 에세이

by 프로이데 전주현
밖에 나가 놀자, 우리! 머그컵을 정리하던 어른의 손길이 멈칫합니다. 아이들이 '우리'라고 불러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른은 '잠깐만'하고 말하더니 옷장에서 알록달록한 모자와 장갑 목도리를 한 움큼 챙겨 나옵니다. 눈 내린 풍경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두꺼운 겨울 옷차림에 원래 몸집의 두 세배가 되어 버린 아이들은 뒤뚱거리며 걷는 서로의 모습에 까르르 웃습니다. 바깥에 나가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의 발아래에 함박웃음이 가득합니다. -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 중에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함께하기로 했지만 무엇을 만들지에 관한 고민은 여전했다. 알고 지낸 세월이 오래되었어도, 서로의 취향에 환호성을 질렀더라도, 글과 그림의 대화는 여느 대화보다도 더 어려웠다. 게다가 처음이라 좀 더 뚝딱거렸다.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고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던지는 가벼운 주제의 말을 영미권에선 스몰토크(small talk)라고 했던가. 커피를 마셨냐고 묻는 인사나 스웨터가 예쁘다고 건네는 칭찬이나 날씨가 변덕스럽다는 평 말이다. 글과 그림의 대화를 이제 막 시작한 지음지기도 스몰토크를 해보기로 했다. 날씨보다 조금 더 큰(?) 개념인 겨울, 겨울에 어울리는 주제를 하나 정해서 작업을 해보기로 했다. 연말 특유의 몽글몽글한 기분을 담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이 12월의 겨울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획의 시작은 아무 말 대잔치였다. 논리적이지 않아도 좋으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브레인스토밍을 마구잡이로 하다 보면 ”어? 괜찮은데?" 하는 것들을 잡아내기가 의외로 수월했다. 스웨터나 목도리처럼 몸을 데우고 나를 보호하는 것, 진심을 담은 손편지의 메시지처럼 마음을 녹이고 남을 보호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또 새해를 앞둔 시점이란 데 주목하며 한 해를 정리 정돈하고 새로운 소망을 품는 마음도 떠올려 보았다. 그러던 중에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12월 26일, 27일, 28일, 29일, 30일, 31일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크리스마스 없이는 12월의 겨울을 설명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별, 소망, 약속, 기대, 평화 등의 키워드가 잇따라 등장했다. 그러다 문득 그 모든 걸 아우르는 한 제품을 떠올렸다. 독일에서 시작된 크리스마스의 전통, 어드밴트캘린더(Adventskalender)였다.


어드밴트는 한국어로 대림절/강림절로 번역되는데, 성탄을 기다리는 4주 간의 기간을 의미하는 기독교 절기다. 기쁨 가운데 촛불을 밝히는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간을 가리킨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드는 달력이 바로 어드밴트캘린더다. 다른 달력과 달리 12월 1일부터 24일까지, 단 24개의 칸/페이지로 이뤄져 있는 게 특징이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 각 칸/페이지를 어떤 덮개 또는 문과 같은 장치로 가리고 있다. 매일 아침, 그 덮개를 벗겨내면서 하루를 확인하는 게 재미다. 종류에 따라 덮개 뒤에는 12월 **일이란 숫자 말고도 자그마한 초콜릿이나 장난감 등이 들어있다.


연말 연초라는 작업 타이밍과 겨울이라는 계절감을 반영하는 데 이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덜컥 글과 그림이 어우러지는 24장의 일력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어설프더라도 매일 조금씩 뭐라도 만들어내야 '아, 내가 일을 하고 있구나'하는 감각이 살아날 것 같았다. 퇴사와 결혼 후 새로 시작한 첫 번째 일이 지음지기였으니, 어서 빨리 성과를 내고 싶었던 거겠지. 돌아보니 마음이 바빴던 것 같다. 글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짧은 것, 문장 서너 개를 적어 정연이에게 보냈다. 정연이는 그 문장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 하나씩, 하나씩, 뭔가 만들어 보긴 했다. 하지만 지음지기는 여전히 뚝딱거렸다.


결국, 어드밴트캘린더 작업을 엎었다. 글과 그림의 대화를 위한 주제를 정하려던 게 달력이라는 제품(콘텐츠의 최종 모습)을 결정하는 데 그쳤다는 데 문제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글이 먼저 있고 그림이 나중에 있기만 한 공정도 아쉬웠다. 대화의 흐름이 일방향인 것 같았다. 작업 체계의 부재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각자의 삶이 있어 업무 시간을 정하긴 어려웠지만 적어도 정기적인 회의 시간을 따로 떼어 놓을 필요는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각자 일이 완성되면 카톡으로 공유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니 아무래도 (정연이와의 친구 관계를 포함한) 일상과 일의 경계가 세게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나도 정연이도 허우적거렸다.




심호흡이 필요했다.


어른과 아이들이 한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고, "로 시작하는 말은 어른의 말, 별다른 호명 없이 환호성을 지르는 말은 아이들의 말입니다. 한 아이의 신발 자국이 주변 어른과 아이들의 신발 자국으로 가득 메워집니다. 크기도, 모양도, 움푹 페인 정도도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모두 가로등으로 걷고 빛 앞에 모여듭니다. 부리나케 손에 장갑을 끼워준 어른에게 한 아이가 말합니다. 놀자 우리! 새하얀 함박웃음이 사방에 가득합니다. -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 중에서


재미있게 글과 그림을 갖고 놀자고 했다. 이전에 주고받았던 전시와 전시 후기글처럼 편지를 주고받듯이 작업을 해보기로 했다. 어떤 제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일단 창작의 놀이터에서 뛰놀기로 다짐한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가장 큰 변화였을지도 모른다. 창작자로서의 태도를 정비한 셈이니깐.


정기적으로 온라인 회의 일정을 정했다. 스스로를 P라고 소개한 정연이가 고맙게도 먼저 제안해 준 J스러운 체계였다(덕분에 지금까지도 지음지기의 작업 전통 중 하나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요). 지금은 2주마다 구글밋츠(GoogleMeets)로 만나고 있지만, 당시는 팀을 결성한 지 얼마 안 되던 때였기 때문에 좀 더 자주 소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매주 만났다. 회의 일자가 정해지니 각자 체크리스트가 절로 만들어졌다. 회의가 있기 전까지 엉터리 문장을 계속 써보고 자유로운 스케치로 각자 손을 풀었다.


카톡에서 지음지기 일 얘기를 하는 건 줄여보기로 했다. 물론 급하거나 중요한 사안은 바로 나누었다. 하지만 동료이기 이전에 친구 사이였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했다. 너무 일만 하는 사이가 되고 싶진 않았던 거다. 서로 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점이야말로 지음지기의 강점이 아닐까?


정기 회의 때마다 스몰토크, 아무 말 대잔치, 브레인스토밍 등 뭐라 불러도 좋을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러다 보니 만들고자 하는 콘텐츠의 형태, 물성도 확고해졌다. 독립출판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다시 새겼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책, 멋 부리지 않고 시리즈성이 돋보이는 형태의 책을 먼저 만들기로 합의했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펭귄북스를 롤모델로 삼았다.


엎어졌던 어드벤트캘린더 작업의 몇 가지도 재활용하기로 했다. 겨울의 키워드를 활용해서 첫 번째 책을 만들기로 했다. '기다림'이라는 키워드 말고도 두 가지의 키워드를 더 추가했다. 반전의 뜻을 담은 '그러나'라는 키워드와 솔직함이란 태도를 떠올리며 '고백' 키워드도 다뤄보기로 했다.


기다림과 그러나, 고백. 모두 기역으로 시작하는 게 우연이냐고? 아니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앞서 시리즈성이 돋보이는 형태의 책을 만들자고 적었었지? 그 시리즈성의 기준점을 한글로 잡았다. 기역(ㄱ), 니은(ㄴ), 디귿(ㄷ)... 가나다 순으로.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두 사람이 한국어로 사고하며 표현한 책일 테니 기왕이면 한글을 하나하나 뜯어서 그 안에 지음지기의 메시지를 담아보자고 했다(즉, 최소한 히읗(ㅎ)이 올 때까지, 지음지기는 계속 일할 거란 말이지. 정년 보장의 독립출판 프로젝트가 될지도 몰라. 호호).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조금씩 확실해져 갔다. 완연한 겨울이 되었을 땐 인스타그램의 피드가 하나둘씩 채워지고 있었다.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지음지기(@drawnnwrittenby) 포트폴리오

그리는 사람 최정연 │쓰는 사람 전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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