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초록

지음지기 비하인드 에세이

by 프로이데 전주현
정연이와 저는 각자 마음속에 숲을 하나씩 두고 사는 사람이에요. 그곳에서 산책을 하기도 하고 잠수를 타기도 하다가, 우연히 손에 넣은 도토리 한 알이 있으면 그걸 시내까지 들고 가서 신나게 이야기하곤 하죠. '마음이 통하는 벗'을 뜻하는 지음지기를 팀 명으로 정한 것도, 글에서 뻗어 나간 그림, 그림에서 뻗어나간 글을 인스타그램에 소개한 것도 다 그 이야기의 일부였습니다. -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 중에서


옛날 얘기 하나 해볼까?


아빠와 종종 뒷산에 올랐다. 입시 경쟁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지기까진 확실히 그랬다. 몇 번이고 올랐던 뒷산인데도 나는 그 산의 이름도 모르고 지냈다. 그저 집 뒤에 있어서 뒷산이라 부르기만 했지, 이름을 찾아볼 생각은 안 해봤던 탓이다. 분명 이름이 있었을 그 산은 높지 않았다. 오르내리면 가까스로 한 시간이 지나가있었기에.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오르막은 버거웠다. 가장 반가웠던 지점은 오르막이 내리막으로 바뀌기 전에 나오는 평평한 길이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신발끈을 점검했고 집에서 챙겨 나온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순간이었다. 목을 적시며 노래할 준비를 했다. 아빠와 나 사이에서 '하산송'이라 불리는 멜로디였다. "내려가는 길, 조심하세요! 내려가는 길, 조심하세요!" 하는 문장을 두 번 반복하면 끝나는 아주 단순한 곡이었다. 하지만 단순했기에 몇 번이고도 반복해서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상황에 알맞은 경고성 메시지도 담고 있어 교육적이기도 했고.


아빠는 자주 말했다. 오르막이 힘들 순 있지만 천천히 가면 괜찮아진다고. 반면에 내리막은 쉬워 보이지만 다치기 쉽다고. 정말로 조심해야 할 땐 내리막을 걸을 때라고 했다. 무서운 내리막 앞에서 나는 아빠가 추천해 준 대로 볼품없이 걸었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오다리를 하고서 잰잰걸음. 그래야 다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그 상태에서 하산송까지 불러댔으니 다른 사람들 눈엔 얼마나 희한한 부녀지간으로 보였을까?


그런 하산송을 잠시 멈출 때가 있었다. 이전보다 내리막이 가팔라서 좀 더 주의를 기울이며 한 발 한 발 내디뎌야 했을 때 그랬고, 바닥에서 도토리를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나는 에 드는 것이면 일단 곁에 두고 오래 보고 싶어 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바다에 가면 조개껍질을, 산에 가면 도토리를 그렇게 찾았. 잘생긴 도토리를 골라내려고 땅에 바짝 웅크리고 있을 때마다 아빠는 가던 길을 멈추고선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러다가 한두 마디 얹곤 했다. 다람쥐 먹을 건 남겨두고 조금만 가져가라고. 그 말을 들으면 선택이 더 힘들어졌다. 다람쥐도 기왕이면 잘생긴 도토리를 먹고 싶어 할 것 같았으니까.



수집은 지금도 여전한 버릇다. 그런데 산이나 숲처럼 초록을 찾아 그 안을 거닌 지는 꽤나 오래되었다. 맘만 먹으면 한밤 중에도 대낮처럼 생활할 수 있는 곳에서 살다 보니, 콘크리트 바닥 생활에 익숙해졌나 보다. 또 머리가 크면서 경쟁심과 조바심도 덩달아 커졌고. 초록이 없는 삶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회색빛 도시 생활로 부지런해졌고 나만의 주장과 취향이 또렷해졌으니깐. 하지만 내심 초록을 그리워하고 있긴 했나 보다. 가끔 어떤 이유에서건 초록을 찾았을 때 중요한 걸 잊고 살았다며 울거나 웃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2년이 조금 더 지난 그때도 그랬다. 코로나 팬데믹이 막바지에 다다른 줄 모르던 때였다. 매일 같이 마스크를 쓰면서 퇴사와 결혼을 준비하며 생각이 많아지던 시절이었다. 도대체 해야 할 일이란 게 있는 건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커 보여서(그 일을 너무 잘 해내고 싶어서) 해야 할 일 뒤에 하고 싶은 일을 숨겨두기만 하는 건 아닌지 헷갈렸다.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인지, 꼭 그래야만 하는 건지 질문했다. 그러던 중에 영화 <소울>을 보고선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잘생긴 도토리를 골라내려다가 고민하던 그 시간, 그 초록 빛깔이 필요했다.


그런데 찾았다. 초록이었다. 아빠와 오르던 뒷산도 아니었고, 회사의 강제로 오른 인왕산 정상도 아니었다. 무엇이었냐고? 막상 마주하면 기쁘고, 평온하고, 노래가 절로 나오는, 다람쥐를 걱정하게 되는, 것이었다. 여러 면에서 초록과 꼭 닮은 것이었다.


기회였습니다.


창작자로 살아볼, 사적인 이야기를 남들과 공유하며 색다르게 바꿀 기회였다. 그 기회는 선언과 함께 시작했다.


"나는 쓰는 사람으로 살래. 글로 벌어먹고 싶어."



아무래도 선언에 힘이 있었나 보다. 머잖아 줄줄이 변화가 이어졌 때문이다. 호칭이 작가로 바뀌었다. 인스타그램 계정이 많아졌고. 책 편집을 위해 어도비 프로그램을 정기결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료가 생겼다. 십 년 동안 언니 동생하며 지냈던 친구, 최정연 그림 작가였다. 평소 서로의 취향을 감탄하며 함께 시간 보내길 즐겼는데, 더 늦기 전에 둘이서 독립출판 팀을 꾸려보기로 했다. 팀의 이름은 정연 작가의 제안으로, '척하면 척인 사이'의 의미를 담아 지음지기(知音知己)라 지었다.


지음지기란 이름의 초록 안에서 뛰논 지 2년이 조금 넘었다. 그동안 여러 열매와 시행착오가 작년 서울에 내렸던 첫눈처럼 묵직하게 쌓였다. 함께 만든 책 세 권, 혼자 만든 책 두 권, 네 번의 북페어, 여러 독립/지역 서점과의 교류 등... 하나같이 뽀드득 소리가 나는 경험들이었다. 눈바닥을 걸을 때 나는 확실하게 기쁜 그 소리 말이다.


출판계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인디) 씬(scene)에서 정연 작가와 함께 쌓아 올린 이야기 탑의 높이커질 때마다 기회를 만들기 이전의(특히 직장 생활을 하던) 저를 자주 소환했다. 그때의 저는 남들의 글을 매끄럽게 다듬고 보기 좋게 편집하고 있었. 윤문을 너무 적게 했다는 피드백을 들어서 욕심 가득 재작업을 했다가 "네가 뭔데 글을 이렇게 고치냐, 감히?"는 식의 항의 전화도 받아봤고, 팀원이 없는데 팀장 자리에 앉혀 놓던 상사 때문에 이력서에 쓰인 직함에 매번 부연 설명을 덧붙이는 면접자가 되기도 했다.


비교하는 습관은 그 비교 대상이 설령 나 자신일지언정 결코 내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비교는 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작아지게 했에. 하지만 그 못된 습관을 상쇄하는 꿈이 생겼다. 앞으로도 우리 주변을 이야기 재료로 삼고서 개인과 개인을 작가와 독자로, 창작자와 창작자로, 어른과 아이로, 선배와 후배로,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주고 싶다고.


그 꿈을 위한 아주 작은 움직임의 일환으로 이 브런치북을 만들었다. 지음지기의 시작과 지난 2년 간의 작업 내용,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등을 담으려 한다. 그렇게 계속해서 창작의 산을 오르려고 한다.

이제 막 하늘길이 다시 열리기 시작하고, 주기적으로 장바구니에 마스크를 담던 습관이 더 이상 습관이 아니어도 될 무렵의 겨울이었어요. 각자의 숲에서 낮밤을 오래 지새운 탓에 '이제는 밖으로 나가볼까?' 하는 호기심이 행동력으로 이어지기 좋은 계절이었습니다. -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 중에서


힘들겠지만 천천히 오르다 보면 평평한 길이 나올 거다. 그러다 마주한 내리막은 위험하겠지만. 그래도 지혜로이 그 위험에 임할 수 있을 거다. 내겐 오르막의 경험과 물 한 모금의 기억, 그리고 하산송이 있으니깐. 어릴 적 찾았던 이름 모를 뒷산을 떠올리니 분명 그럴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든다.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지음지기(@drawnnwrittenby) 포트폴리오(노션)

그리는 사람 최정연 │쓰는 사람 전주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