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지기 비하인드 에세이
계산대로 향하는 두 사람의 손에 똑같은 책이 들려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예언 하나 하지요. 조만간 저 책은 두 사람에게 읽힌 뒤 두 권으로 나뉠 겁니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요.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 <너와 나의 니은> 중에서
하루가 길어진다면 기차를 더 자주 타고 싶다. 서울과 대구를 오가던 일상과 유럽에서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나들던 경험 때문일까, 기차는 대체로 호감이었다. 여행과 가까웠고 아날로그와 어울림이 좋았고 매번 내 마음을 느긋하게 했다. 덜컹거리는 열차에 올라타면 평지에서 끝없이 요동치던 마음이 잠잠해진 듯한 착각에 빠졌다. 굳이 헤어 나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꽤 괜찮은 착각이었다. 마음이 조용해지면 몸이 편해졌고 행동도 덩달아 느긋해졌기 때문이었다. 요람에 누인 아이처럼 밀린 잠을 청하기에도, 무릎 위 마련된 접이 선반에 책이나 도시락을 올려두고 집중의 시간을 갖기에도, 적당한 속도였다. 기차를 타면 평소에 필요 이상으로 바삐 생각하고 움직이고 있었단 생각이 들었다. 그 어느 시대의 기차보다도 빨리 달리고 있을 텐데 그 안에서 나란 승객은 한없이 느려지다니. 내가 숨을 돌릴 동안 대체로 지연 없이 정해진 일정대로 나를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성실함까지. 기차는 정말이지 ‘천천히 빨리‘ 갔다.
여러 기차 중, KTX를 이용할 때마다 즐겨 보는 책이 있다. 지정석 정면에 비치된 작은 그물망에 꽂힌 KTX 매거진이다. 달마다 발행하는 잡지인데, 시간을 들여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웠던 지역 축제나 국내 여행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표지 모델도 덩달아 국내 여행지 풍경 사진인데, 재미있게도 책 하나에 표지가 두 개다. 책의 앞면이 뒷면이 될 수도 있고, 책의 뒷면이 앞면이 될 수도 있는, 1+1=1 같은 책이다. 어느 쪽에서 펼치건 내가 펼친 방향에서 좌에서 우로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단, 표지가 두 개여서 매거진의 중간 지점에서는 책의 화면이 180도 반전되는데, 그때부터는 매거진을 뒤집어 읽어야 한다. 두 권의 책/두 개의 표지 모델을 두루 신경 쓰려는 연출이다. 경제적이고 재미있다는 인상을 준다.
꼭 붙은 둘이 하나를 이룬 매거진을 보면서 나는 어린 시절 즐겨 먹었던 간식. ‘짝꿍’을 자주 떠올렸다. 지금은 단종되어 찾아볼 수 없지만 어쩌다 90년생 또래들에게 “그거 생각나?” 하면서 물으면 “아, 나도 그거 엄청 먹었는데!” 하면서 바로 반응이 오는 사탕이었다. 짝꿍은 어린이의 손에 쏙 들어오는 종이 상자에 담겨 있었다. 상자는 진분홍색과 보라색 두 개의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 칸의 옆면(상자의 오른쪽 옆면과 왼쪽 옆면)에는 새끼손가락으로 톡 구멍을 낼 수 있는 문 모양의 절취선이 나 있었다. 진분홍색 칸의 문을 뜯으면 진분홍색 사탕이 쏟아졌고 보라색 칸의 문에 구멍을 내면 보라색 사탕이 쏟아졌다.
사탕의 크기가 좁쌀보단 조금 크고 다아이몬드 모양의 흑설탕 조각보단 작았기에, 상자를 쥔 손 옆에서 놀고 있는 다른 한 손바닥에 조심스레 부어 먹어야 했다. 아무래도 작은 사탕이라 입안에 들어가면 금방 녹았다. 때문에 짝꿍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손바닥에 ‘조심히 그러나 수북이’ 쏟아내서 입 안 가득 털어 넣는 거였다. 우물우물 단 맛을 입안 가득 녹여 먹는 게 참 황홀했다. 두 칸으로 나뉜다 한들, 하나의 상자로 묶여 있었기에 상자의 옆면 대신 아랫면을 열면 진분홍색과 보라색 사탕이 동시에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짝꿍은 다른 색을 하고서 붙어 있는 두 종류의 사탕을 번갈아가면서, 비교해 가면서, 수동으로 섞어가면서, 먹을 때가 제일이었다. 수고스러워야 1+1=1이란 메시지가 더 살아났다. KTX 매거진도 마찬가지였다. 포항이라 적힌 표지를 펼쳐 읽다가 매거진 가운데쯤부턴 매거진을 180도 돌려서 목포라 적힌 표지부터 다시 읽었다. 새 책을 읽는 기분도 들고 책과 놀이를 하는 기분도 들고 두 권의 책/두 개의 표지 모델이 한 데 어우러진다는 인상도 즐길 수 있었다.
같은 주제에서 뻗어나간 글과 그림의 시선, 그 속에서 나와 너의 다름을 발견합니다. - <너와 나의 니은> 중에서
기차를 자주 탐, 기차 여행을 좋아함, 좋아하는 시간에 반복적으로 책을 들여다 봄, 책의 연출에서 어릴 적 즐겨 먹던 사탕을 떠올림… 연상 퀴즈처럼 흘러가는 위 이야기는 나의 사고방식을 꼭 닮았다. 의식의 흐름이라 포장해도 좋고 주의 산만이라 지적해도 할 말이 없는 흐름이다. 그런데 이게 또 기획과 편집, 연출, 홍보 등 N잡러가 돼야 하는 독립출판 작가에겐 그렇게 유용할 수가 없다. 일례로, 1+1=1이란 메시지는 지음지기의 두 번째 책 <너와 나의 니은>의 바탕이 되었던 프로젝트 니은(ㄴ)의 뼈대를 마련했고, 뒤이어 <너와 나의 니은>의 편집에도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 책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을 편집하고 있을 때였다. 두 번째 책 <너와 나의 니은>의 편집을 동시에 진행했다. 지음지기의 첫 번째 북페어(2024 제주 북페어)이자 데뷔를 위해서, 콘텐츠의 시리즈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 권보단 두 권을 함께 내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재미있게도 각 책에 담긴 글과 그림의 대화가 꽤 결을 달리하기도 했고.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에서는 “글과 그림이 이렇게 잘 어우러져요! “ 하며 #함께 #티키타카를 강조했다. 반면 <너와 나의 니은>에서는 ”같은 것을 보고, 읽고, 떠올려도 글과 그림은 이토록 달라요! “ 하는 #다름, #독백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나의 팀으로 엮여 있지만 둘로 쪼개지는 책, 각자의 색과 맛이 살아있는 책! 나는 자연스레 KTX 매거진과 짝꿍을 떠올렸다. 두서없었지만 신나서 아이디어를 말했다. 늘 그랬듯이 정연이는 내 말을 쉽게 끊지 않았다. 생각을 길게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표현을 정리하고 체계를 잡아갔다. “프로젝트 니은이 글과 그림의 다름에 주목하고 있으니까 그걸 책으로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실제로 책을 쪼갤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재밌겠다. 학생 때 자습서 사면 이론 파트랑 문제 파트, 문제 파트랑 문제 해설 파트 이렇게 뜯어서 나눠지듯이, 우리도 <쓰다> 책과 <그리다> 책으로 나눠지는 거지…” 주저리주저리가 계속될수록 회의록도 길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1-2주뿐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우리는 독립출판 제작자답게 단가를 따지고 디자인의 한계를 논하면서 몇몇 생각을 지워나갔다. 늘리고 늘리다가 결국엔 많이 지우는 것. 지음지기의 편집은 늘 그랬다.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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