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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지음지기 비하인드 에세이

by 프로이데 전주현


옅은 회색빛 기운이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었어. 그 정도 층이면 하늘색이 진해질 법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 날씨는 힘알탱이가 없었지. 오랜만에 바깥 구경을 나간 거였는데 속상했어. 날씨는 곧 분위기고 분위기는 예언을 뒤집는 변수 같은 건데, 변수가 꽝인 걸 어떡해. 점술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말한 대로 된 게 아니겠소,” 하며 힘주어 말했을 거야. - <너와 나의 니은> 중에서


시절과 계절이 하는 일이 많다. 세상이 평평한 화면 속 같았더라면, 나라는 사람을 주인공 삼은 게임 같았더라면, 배경화면 역할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입체적인 세상에 사는 입체적인 사람이다. 시시각각 달라진다. 시절과 계절이 힘을 발휘하기에는 이만한 조건이 어디 있을까. 어쩌다 몸이 찌뿌둥한 것도,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도, 세상이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에 취하는 것도, 어느 정도 시절과 계절이 일한 탓이고 덕이다. 그들은 내가 쓰는 글에도 영향을 끼친다. 하루 종일 눈이 내리는 날에 쓴 글과 세탁소에 맡겼던 롱패딩을 찾은 날에 쓴 글, 냉면집 앞에서 오래 줄을 선 날에 쓴 글과 모두가 코와 입을 마스크로 가리고 다니는 날에 쓴 글이 다 다르듯이.


처음이 프로젝트 기역(ㄱ)이었기에 그다음은 니은(ㄴ)이었다. 개나리, 목련, 벚꽃이 차례대로 피었으니 혼돈이 적은 봄에 처음 그다음을 준비했다. 그때 쓴 글과 그린 그림을 <너와 나의 니은>이란 제목의 책으로 엮은 건 꽃이 진 자리마다 눈이 소복이 쌓였을 때였다. 두 번째 책에서도 지음지기가 글과 그림의 대화를 모토 삼은 팀이란 걸 꾸준히 보여주고 싶었다. 다만 강조점이 ‘다름’에 있었다. 비록 같은 장면(사진)을 보고, 같은 텍스트(키워드)를 읽고, 같은 상황을 마주한다 하더라도, 그리는 사람 정연과 쓰는 사람 주현의 시선이 다르다는 게 포인트였다. 그렇게 ' 달라도 괜찮아요, 달라도 어우러질 수 있어요'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회의 때마다 각자 함께 보고, 읽고, 생각해 볼 것들을 가져왔다. 그 시간을 위해 휴대폰으로 사진을 많이 찍고, 오래된 사진첩을 들여다보고, 사람들이 글감 삼은 것들의 목록을 찾아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몇 번의 회의 끝에 ‘창작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지, 독자도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소재인지,’ 를 기준 삼아 네 장의 사진과 네 개의 키워드, 그리고 하나의 상황을 골라냈다.


남은 일은 단순했다. 나는 글을 쓰고 정연이는 그림을 그리면 되었다. 그렇게 목련 봉우리가 꿈틀거릴 때부터 목련 꽃잎이 크림색 옷을 갈색 옷으로 갈아입을 때까지 프로젝트 니은을 운영했다.



봄에 쓴 글은 겨울에 쓴 글보다 장난스러웠다. 겨울에 쓴 글에는 따뜻한 머그잔을 들고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의 시선이 가득했던 반면, 봄에 쓴 글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집 앞 놀이터로 나가는 움직임이 많았다. 뽀드득하는 발소리 대신 햇빛으로 바짝 마른 보도블록 위를 총총 걷는 느낌이었다. 정연이의 그림에도 색이 더 많이 쓰였다. <숲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습니다>에 수록된 그림들보다 좀 더 재치 있고 밝아졌다. 처음으로 밟아 본 흙길을 탐색하는 아기 고양이 같았다.


봄에 작업한 글과 그림은 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걷고 있었다. 생명 사이를 산책하고 있었다.


1초간 망설임, 1초 동안의 거절, 1초의 생각, 1초만에 결단, 1초 후 선택, 1초간 행동, 쌓이고 쌓이고 모이고 모여서 몸집을 키운다. - <너와 나의 니은> 중에서


책의 표지를 고민할 때, 정연이는 우리 집 앞 목련나무 풍경이 마음에 든다면서 표지 그림으로 목련을 그리고 싶어 했다. 책과 글, 그림의 계절감을 맞추려하다니, 멋진 생각이었다. 콘텐츠의 분위기가 잘 잡힐 것 같았다. 응원 겸 압박 차원에서 당장 DSLR을 들고나가 집 앞 목련 풍경을 여러 장 찍어 보냈다. 그러나 정연이는 역시나 차분하게, 보란 듯이, 그림을 완성했다. 그림 속 목련의 크림색 꽃잎은 (내가 좋아하는) 화이트초콜릿 케이크를 꼭 닮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림에서 쫀득하고 달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화사하고 맛있어 보이는 표지 그림을 보자 <너와 나의 니은>을 위한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책 속의 책, <쓰다>와 <그리다> 사이에 울타리를 쳐주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글과 그림, 주현과 정연을 따로 떼어 볼 수 있게끔 쉼표 같은 페이지를 몇 장 삽입하자는 거였다.


앞선 글(연상)에서 밝혔듯이, 프로젝트 니은과 <너와 나의 니은>은 1+1=1, 한 권의 책이 두 개로 쪼개지는 콘셉트로 시작한 작업이었다. 그를 위해 책 편집도 앞에서부터 읽느냐, 뒤에서부터 읽느냐에 따라 <쓰다> 전주현 책이 될 수도 있었고, <그리다> 최정연 책이 될 수도 있도록 해두었다(1쇄 땐 한국 책 읽듯이 읽으면 <쓰다>가 나왔고, 일본 책 읽듯이 읽으면 <그리다>가 시작되도록 했고, 2쇄 땐 KTX 매거진처럼 <쓰다>와 <그리다> 표지가 두 개 있는 책으로 만들었다).


“<쓰다>와 <그리다>, 주현과 정연, 글과 그림이 만나는 지점에서 목련이 피어나는 연출은 어때? 두 권의 책이 맞닿은 부분에 목련 그림을 삽입하는 거야. 가령, <쓰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 흙길을 닮은 색지가 나오는데, 그 색지 가장자리에 목련 그림을 작게 넣어두는 거지. 그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그 그림이 전체 페이지를 덮을 정도로 커져 있게 하고. 그렇게 목련이 피어났다는 걸 은연중에 보여주는 거야. <쓰다>에서 <그리다>로 넘어갈 때도, <그리다>에서 <쓰다>로 넘어갈 때도. 봄에 작업한 것들은 봄을 담아낼 수밖에 없잖아. 그걸 책 안에 담아내보는 거야!”


이 말에 정연이가 감탄했던 게 기억난다. 덩달아 나도 으쓱하고 있던 것도.


이날 이후로 목련은 <너와 나의 니은>의 겉옷과 뱃살을 책임지게 되었다. 북페어나 서점 등지에서 (예비) 독자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자부심을 갖고 보여드리는 페이지가 되었다.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지음지기(@drawnnwrittenby)​​ 포트폴리오​​

그리는 사람 최정연​​ 쓰는 사람 전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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