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의 여왕은 지치질 않아

왕관의 무게

by 프로이데 전주현


엄마의 눈은 평소에도 꽤 맑은 편이다.
그런데 그 눈빛도 배로 밝아질 때가 있다. 그건 바로 쇼핑을 할 때.



사람 수만큼 다양한 여행 스타일이 있다. 옳고 그름이나 맞고 틀리다의 영역이 아닌 취향의 영역이기 때문에 여행 경험이 적다면 쉽사리 자신의 스타일을 설명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그 사람을 알아가기 좋은 대화 주제도 없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지금까지 만들어 오고, 앞으로도 만들어갈) 나의 여행 스타일은 다음과 같다.


1. 계획과 즉흥의 비율은 6.5 : 3.5 또는 7 : 3으로 한다. 시간과 돈 낭비 그리고 돌발상황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즉흥이라 적었지만 미리 구글맵으로 저장을 해두고 일정으로 픽스해두지 않은 곳을 추가로 방문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 인기몰이 중인 풍향고를 재밌게 보면서도 얼마나 화가 났는지.)


2. 쉬는 여행보단 배우는 여행을 즐긴다. 역사와 문화가 담긴 최적의 여행지로 도시를 꼽으며, 미술관이나 박물관, 지역 서점과 문화예술공간을 빼놓지 않고 방문한다. 휴양지는 노년에 가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걷기 좋은, 걸어야 제대로 즐기는 여행지를 둘러보자는 주의다. 그래서일까, 나의 신혼여행지는 로마와 피렌체였다(약 2주간).


3. 여행 중 호화스러운 식당에서의 먹부림은 한두 번으로 족하다. '꼭 먹어봐야 하는 것'이란 제목에 현혹되지 않는달까. 대신 시장이나 식료품점 구경은 빼놓질 않는다. 가능하다면 조리 가능한 부엌이 딸린 곳을 숙소로 잡고서(airbnb 만세!) 현지 식재료로 아침이나 저녁을 해 먹는 걸 선호한다(그런 숙소를 잡으면 한식을 챙겨가서 해먹기도 좋다).

4. 높은 곳, 전망대에 굳이 올라가지 않는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건 아니고 그저 내 지론이 그렇다. "에펠탑 위에 올라가면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다." 내 위치에서 즐길 수 있는 풍경은 두 발 딛고 선 땅에서란 생각 때문이다.


5. 웅장한 자연경관을 보겠다고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현지인들의 생활 습관이나 취향이 드러나는 샌드위치 가판대나 문구점, 그릇 가게, 공원을 거닐며 소소한 (아이) 쇼핑을 즐긴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짐가방을 풀면 뭐 자잘 자잘한 것들이 가득 나온다(비싼 건 또 안 산다). 편지봉투, 과자, 티스푼, 필기구, 좋아하는 작가의 번역서, 공원 안내도...


6. 패키지여행은 사절이다. 오롯이 내가 자유로이 기획하는 여행을 즐긴다. 속도감 있게 진행하는 여행보단 여행 기간 중에 한 번 간 곳도 여러 번 방문하면서 여유로이 주변을 산책하는 일과를 선호한다. 날씨가 좋다면 텀블러에 라면 국물을 담고 근처 식당에서 튀김 음식을 포장해 공원에서 소풍을 즐기고, 우연히 들린 카페에서 마신 라테가 맘에 들었다면 그다음 날에도 그곳에 가 음료를 주문한달까.


적다 보면 더 많이 나오겠지만 대충 이 정도다(어디, 여러분들과 무엇이 비슷하고 다른지?). 이중에는 부모님과의 여행을 준비하면서 강화되는 것도 무시되는 것도 여럿 섞여 있다. 특별히, 이번 삿포로 여행 중에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강화된 게 있었다(내가 나를 잘못 알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바로 5번이었다.


엄마와 여행을 다니기 전만 하더라도 나는 내가 여행지에서의 (아이) 쇼핑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엄마 앞에서 나는 검소한 여행자였고, 그저 산책하길 좋아하는 여행자였다.



엄마의 눈은 평소에도 꽤 맑은 편이다. 그런데 그 눈빛도 배로 밝아질 때가 있다. 그건 바로 쇼핑을 할 때. 그 때문에 엄마는 우리 집에서 '황녀'라는 별명 말고도 '쇼핑의 여왕'으로 불리는 일이 많았다.


삿포로 여행의 여러 요소들이 엄마의 눈을 연신 빛나게 했다.


1. 일단, 이동의 제약이 사라졌다. 여행용 휠체어란 기동력을 갖췄으니까. 또, 뭣하면 지팡이를 집고 천천히 걸어 다니면 되었으니 플랜 B까지 준비만반이었다.


2. 삿포로 도심과 상점들의 도보가 깔끔하고 매끄러웠던 것도 편안한 쇼핑에 한 몫했다. 휠체어를 끌기에도, 두 발로 걷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3. 지원군도 많았다. 길 찾고 일본어를 통역해 주는 딸내미(나)가 엄마 옆에 딱 붙어 있었고 충실한 짐꾼이 한 명도 아닌 둘씩이나(아빠와 사위) 있었다.


4. 쇼핑할 곳들이 우수수 몰려있었다. 기껏 찾아놓았던 상점이 성에 차지 않았더라도 주변에 다른 구경거리가 수두룩했다.


여러모로 쇼핑의 여왕이 폭주하기에 딱 좋았다. 문제는 그 폭주의 중심에 임신 9주 차인 내가 동행했다는 거였다. 배가 부르진 않았으나 확실히 이전보다 잘 못 걸었다. 난생처음 겪는 몸의 변화로 걸음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도 평소엔 30분이라도 짧게 낮잠을 청했는데, 그 시간 없이 종일 쇼핑가를 거닐려니 부쩍 피곤해졌다.


하지만 엄마의 눈은 이미 과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전날 저녁에 다음날 일정 브리핑으로 내가 "쇼핑!"이라고 외친 탓이다. 의욕 넘치는 그 눈빛을 모른 척하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감행한 가족여행인데, 내가 좀 참고 말지. 그래서인지 여왕의 쇼핑 의전에 쉴 새 없이 응했다.


매 쇼핑엔 일정한 패턴이 따랐다.


시작은 부드럽게. "주현아, 저기 한번 보자."

휠체어에 앉은 엄마가 손가락으로 어느 가게를 가리킨다. 때에 따라서 "저긴 뭐 하는 곳이니?"와 같은 간접적인 문장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 말에 나는 휠체어를 끌고 가게 앞으로 가 브레이크를 걸고서 상황 파악에 나선다. 여긴 뭘 파는 곳이지.


가게의 정체를 파악해 엄마에게 알려준다. 호기심이 생긴 엄마가 안전벨트를 풀고 휠체어에서 일어선다. 오른손으로는 지팡이, 왼손으로는 나를 잡고서 가게를 탐방한다. "이건 뭐니? (...) 얼마야?" 아무래도 엄마는 딸내미의 일본어 실력을 과신하고 있는 것 같다(엄마, 나 기껏해야 녹슨 수능 일본어 1등급 수준이야. 잠깐만 기다려봐. 번역기 돌려볼게).


우리를 뒤따라오던 아빠가 휠체어에 앉는다(손에는 이미 쇼핑백이 한 두 개 들려 있다). 가게에 들어오는 대신 가게 앞을 지키기로 한다(구경하는 곳이 문구점이 아닌 이상, 아빠는 늘 그런다). 사위는 가게의 분위기를 보고서 행동한다. 함께 구경하기도 하지만 아빠 곁에서 말동무를 하며 쇼핑이 끝나길 기다릴 때도 많다.


심미안과 물건 탐색력은 여왕의 큰 장점이다. 보통 사람은 지나쳤을 법한 물건도 기어이 찾아낸다. 그리고 또 질문. "이건 그건가? (...) 얼마야?" 처음엔 엔화로 가격을 알려준다. 그러다 오랜 구경과 연이은 질문에 지치면 은근슬쩍 환율 계산을 해서 한국 돈으로 얼마라고 알려준다. 내심 엄마가 그만 샀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맘에 드는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으라고 내게 지시한다. 하나만 사도 될 것을 두세 개씩 때도 많다. "나중에 선물할 때 좋아, "하는 논리가 작용한다. 아마 엄마에게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 테스트를 해보라고 하면 선물이 상위권에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장바구니를 만족스럽게 채운 엄마가 휠체어 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계산대 직원과 독대하며 또 예의 그 대화를 나눈다.

"후쿠로 아리마스까(봉투에 담아 드릴까요)?"

"하이, 오네가이시마스(네, 부탁드립니다)"

지참한 개인 가방에 넣기엔 구입한 물건들이 꽤 많아 자주 유료 봉투를 사게 된다.


가게를 나와 봉투를 짐꾼들에게 건넨다. 둘이 알아서 큰 쇼핑백에 짐을 나눠 든다. 그러는 사이 엄마는 휠체어에 앉아 체력 보충을 하면서 다른 가게를 눈으로 스캔한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한 마디.


"주현아, 저기 한번 가보자."


예예, 갑니다요.


짐꾼 둘과 다음 타깃을 노리는 쇼핑의 여왕





의전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일기장을 펼쳤다. 기억에 남는 일화와 여행 루트를 기록하고서 불룩해진 지갑의 지퍼를 연다. 분명 돈을 썼는데 지갑이 불룩한 이유는? 영수증 더미 때문이다. 하루 종일 쇼핑의 여왕을 모셨다는 증거자료들. 드립 커피는 우리가 산 거고, 컵은 엄마가 산 거고... 여행 내내 내가 결제를 전담하고 추후에 엄마와 정산을 하는 방식이라, 꼼꼼히 기록해 둔다.


그 사이에 여왕의 사위(남편)는 씻고 나와 침대에 대자로 눕는다.


"어머니가 쇼핑할 땐 우리보다 체력이 좋으셔."

"괜히 쇼핑의 여왕이 아니라니까."

"알면서도 매번 놀라."

"짐꾼 하느라 수고했어."

"그래도 나 이거 하나 건졌다?"


남편의 손에 하타찌 마사지 기구가 들려 있다. 승모근과 어깨 쪽에 은색 구슬을 굴리며 쓰는 기구인데, 구슬 안에 물이 들어가 있어 따뜻하게 데우거나 냉동실에서 얼려뒀다가 쓸 수 있단다.


"그건 또 언제 샀대."

"어머니 컵 사실 때 봤지. 이리 와봐. 내가 목 풀어줄게."


오늘의 지출 기록을 잠깐 멈추고 남편 앞으로 가 등을 보이고 앉는다. 포니테일을 위로 들어 올리자 차가운 감촉의 은색 구슬이 목덜미에 와닿았다.


"앗 차가."

"어때, 시원해?"

"응. 이거 되게 좋다. 잘 샀어."

"쇼핑의 여왕의 사위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우리는 그 마사지볼에 삿포로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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