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식탁으로
배 부른 사람이 말을 가려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배 부른 사람에겐 못할 말이 없기도 하다(찬스다!).
털게 사건 이후(에피소드 07. 털게는 이제 안 먹어도 되겠다? - 한 줄 요악: "여행의 계기가 되었던 털게 요리가 여행의 주인공이었던 엄마의 성에 차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곧바로 잠들지 못했다. 게 요리 한번 근사하게 먹고 오자며 시작한 가족여행이라 그런지, 엄마가 악의 없이 툭 내뱉은 말이 쉽게 잊히질 않았다. 늦은 시간, 남편과 숙소 근처 편의점을 서너 개 돌아다니며 괜히 홋카이도 산 우유와 지역 한정 간식을 산 게 아니다. 털게 사건의 충격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자 벌인 즉흥 산책이었다. 털게 사건이 있었지만 별도의 사고 없이 가족여행을 무사히 마친 것을 자축하자는. 다음날 일정은 체크아웃과 귀국행 비행기를 타는 것뿐이었으니, 여행이 거의 끝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숙소에 돌아와 병 우유를 맥주처럼 들이켰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하네. 그냥 잘 먹었다 하면 될 것을."
내가 씩씩대면,
"어머니..."
남편이 울상을 지었고,
"푸하하하."
잊으려 해도 털게 사건이 자꾸 떠오른 남편이 너털웃음을 지으면,
"준경, 그래도... 난 맛있게 먹었어."
내가 애써 좋게 좋게 포장을 했다.
엄마는 알았을까. 바로 옆방에서 딸내미와 사위가 본인의 한 마디에 몇 시간째 일희일비하고 있었다는 걸.
서로를 위로하던 밤이 지났다. 삿포로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조식당으로 내려갔다. 엄마, 아빠는 벌써 한 테이블 차지하고서 뷔페를 즐기고 계셨다(미리 식권을 나눠드리길 잘했다). 남편과 나는 거기서 두 줄 옆에 위치한 테이블로 자리를 안내받았다. 엄마는 뭔가 오물오물 만족스럽다는 듯이 씹고 있었고, 아빠는 저 멀리 조리대를 찬찬히 살피며 접시 가득 뭔가 담고 있었다.
음식을 담으러 가는 길, 엄마 옆으로 가 알은체를 했다.
"잘 잤니?"
(반은 잘 못 자고 반은 잘 잤지. 엄마가 어제 털게는 이제 안 먹어도 된다고 했잖아.)
나는 속에 있는 말 대신 조식이 맛있냐는 질문을 꺼내며 엄마를 살포시 안았다. 엄마의 입가에 빵 부스러기와 오믈렛 조각이 조금씩 묻어 있는 걸로 보아, 털게 정식보다는 신나게 먹고 있는 거 같았다. 접시를 가득 채운
아빠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아버지!"
남편이 알은체를 하자, 아빠가 웃으며 화답했다.
(그래, 두 분이라도 잘 주무셨으면 되었지.)
그러고 보니 3박 4일 동안 한 호텔에 묵으면서도 매일 아침, 다른 조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호사를 누렸다. 숙소 예약을 위해 인터넷을 뒤질 때만 하더라도 서양식과 일본식 두 가지 조식 코스만 있다고 나왔는데, 체크인할 때 호텔리어의 설명을 들어보니 총 세 가지의 조식 코스를 즐길 수 있었다. 해산물이 돋보이는 일본식 뷔페와 일본식 한상 차림, 그리고 마지막 날 아침(바로 오늘) 즐기러 온 서양식 뷔페. 이렇게 세 가지였다.
일본식 조식들도 정말 맛있게 먹었지만 조식당의 분위기나 음식의 가짓수를 따져봤을 때, 호텔에서 가장 신경 쓰는 조식당은 서양식 뷔페인 것 같았다. 지역 특산 식재료를 잔뜩 뽐내고 있는 게 비치해 놓은 꿀의 가짓수에서부터 느껴졌다. 고운 빛깔을 뽐내는 해산물도 많았는데 초기 임산부인 나는 그저 입맛만 다셨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조리장이 상시 대기하고 있던 즉석 오믈렛 코너였는데, 다진 건버섯이나 건새우, 쪽파 등 작은 속재료로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했다. 건버섯과 건새우를 골라 조리장에게 건네자, 준비해 둔 계란물이 철판 위에서 춤을 추더니 단 몇 초만에 오믈렛이 뚝딱! 완성되었다. 모난 곳 하나 없이 동글동글한 모양. 그림 같았다.
한동안 둘이서 조식 평을 나눴다.
"어제 편의점에서 사 먹은 우유보다 훨씬 고소해."
"오믈렛이 미쳤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만드시는 거지?"
"이건 야생화 꿀인가 봐. 방금 먹었던 것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맛이 나."
"감자조림도 맛있어."
...
곁눈질로 본 엄마, 아빠 테이블은 한창 후식을 즐기고 있었다.
"엄마, 아빠도 맛있게 드시는 거 같네."
털게 생각에 내가 살짝 아련한 투로 운을 떼자,
"저번에 도쿄 갔을 때 생각하면, 이번 여행은 숙소가 진짜 좋았어."
남편이 칭찬으로 분위기 반전을 꾀했다.
"하긴 매일 다른 아침식사 먹은 것도 럭키인데, 다 맛있었어. 그지?"
그 마음에 동조하고자 내가 목소리를 밝게 갈아 끼워 말하면,
"그럼. 잘 먹은 아침식사 삼 일이면 절반은 성공이지. 물론 털게는 실패했지만..."
남편이 장난스럽게 '#성공적'이란 카드를 꺼냈다.
귀국행 비행기 게이트 앞에 앉아 여행 마지막날을 점검하며 일기장을 펼쳤다.
(...) 털게 사건으로 꽁해 있는 것도 삿포로 가족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챙기는 한 끼 식사, 그중에서도 하루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아침식사가 따뜻하고 든든했다면, 그 또한 그럴싸한 추억거리이지 않을까.
배 부른 사람이 말을 가려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배 부른 사람에겐 못할 말이 없기도 하다(찬스다!). 그만큼 먹는 게 우리의 마음이나 태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거 아닐까. 언젠가 삿포로 가족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처럼, 만족스러운 아침식사를 했을 때, 다시 엄마에게 얘기해 볼까 한다.
"엄마, 이번엔 털게 말고 대게 먹으러 갈까? 엄마 게 좋아하잖아." 하고. (...)
저희가 묵었던 호텔은 '삿포로 그랜드 호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