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장맛비가 시작될 것이다-오늘 밤부터! "어젯밤에 그려놓은 장미부터 채색을 할까? 아니면 도라지 꽃 사진을 찍고, 꽃을 좀 따 볼까?" 하루를 통째로 보면 어느 것을 먼저 해도 상관없다. 아이들이 어릴 적 갖고 놀던 레고 통을 팔에 걸고 도라지 밭으로 간다.
장마를 대비해 한 달 전쯤 잘랐던 도라지 꽃대에선 건강하고 질긴 질감의 꽃들이 수북이 솟아올랐다. 처음보다 몇 배 더 불어난 봉오리들도 올라오고 있다. 다른 꽃들은 여러 가지 색으로 피어난다. 코스모스만 하더라도 다섯 가지 색 이상이며 백일홍은 무려 열다섯 가지 색은 되는 듯하다. 하지만 도라지 꽃은 두 가지 색 이상을 보지 못했다. 청보라도 좋지만 흰색 도라지꽃은 또 얼마나 예쁜지. 올해는 그립던 흰 꽃들이 풍성하게피어나고 있다.
꽃들의 분위기를 살려 사진을 찍고 그중마음에 드는 몇 컷은 그림으로 옮길 거라 마음이 긴장된다.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찍어가는 중 확 올라오는 지열과 습기를 동반한 뙤약볕에 땀범벅이 되어 헉헉대는 나와는 달리 도라지꽃은 의연하다. 이제 꽃을 딸 시간. 도라지 뿌리보다 꽃이 좋았던 J와 나는 넓은 땅에 씨앗을 파종했지만 한 개의 새싹도 돋아나지 않은 실패를 이미 경험했다. 다행히 두 번째 만에 이렇게 많은 꽃들을 만나게되었다.
흰색 꽃은 도대체 어떻게 그리는 거야? 얼마 전 흰색 모란을 탁월하게 그렸던 B에게 물으니 정말이지 물감이 거의 들지 않더란다. 초록 바탕을 칠하고 나면 저절로 흰 꽃이 드러날게 될까?
도라지 꽃들을 집 안으로 들여왔다. 큰 봉오리들은 손가락만 닿아도 꽃으로 풀어진다. 꽃은 보니 통꽃으로 하나이며 별 모양이다. 오므라진 모양에서 자로 잰 듯 정확히 펼쳐지는 게 도형 같다. 흰색 꽃들은 한 방향으로 통풍이 잘 되도록 놓았고 보라색은겹쳐 놓았다.
글을 쓰다 보니 다른 뭔가를 해보고 싶다. 당장 멈추고 한 움큼의 꽃들을 티팟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오~
파란색 붓을 찬물에 담근 듯짙은 청색 빛이 물을 타고 들며 천천히 내려온다. 더 뜨거운 물을 절반 남은 티팟에 연이어 부으니 천천히 유리 망 안의 꽃들이 피어난다. 뜨거운 물꽃의 컬래버레이션은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와 울트라 마린 딥(ultramarine deep)을 한껏 풀어낸다.
바깥일을 하던 J에게 소리쳤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만나자고. 지금! 이 뜨겁고 짙푸른 바다 색의 차를 함께 마시고 싶다. 또 뭔가 새로운 즐거움을 경험했구나 짐작되어선지 그는 웃으며 자리를 잡는다. 장맛비가 쏟아져 더 맑아진 대기 속에서우린 마시고또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