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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희 Nov 06. 2016

은행나무 부부

신랑의 엄지발가락이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을까?


    우리 집엔 우리 부부 외에 한 부부가 더 살고 있다. 그들은 집을 드나들 때 거치게 되는 정자 옆에 서 있다. 지난 월요일 문경새재에서 찬란한 빛을 뿜어대던 은행나무 행렬을 보았다.

    "우리 집 은행나무 부부도 저렇게 물들어가겠지?"

하지만 웬걸, 집 밖을 나갔던 남편이 큰소리로 외쳤다.

    "밤새, 은행잎이 다 떨어져 버렸어!"

    "아직 단풍이 제대로 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단풍과는 별 상관이 없나 봐!"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 두 번째 날 노랑과 초록 은행잎은 밤새 화르르 다 떨어져 버렸다.



    작년부터 우리와 인연이 된 은행나무 부부 중 아내는 자식들인 씨앗을 남기고 먼저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무 전체가 다 물들어갈 즈음 남편 나무도 조금씩 물들어갔다. 그러다 아내는 단풍이 더 이상 샛노랄 수 없게 될 때 황금빛으로 채도를 낮춰가며 땅으로 떨어졌다. 남편도 아름답게 물든 뒤  곧 그녀 뒤를 따랐다. 올해는 이 순차적인 흐름이 지켜지지 않았다. 단 하룻밤 만에 다  떨어져 버린 노랑 은행잎은 주변 바위틈의 다년생 화초들을  덮어주었다. 초록 잎들 역시 제 주변의 지표 식물들을 커다란 초록 이불로 덮어버렸다. 어떤 조짐도 없이 떠나가 버린 그들이다.


       

    "너의 노란 우산 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로 시작되는 곽재구 시인의 시처럼 지내보리라 마음먹었던 나는 지금의 실망스러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 쏟아져 내린 은행나무 잎 길을 아쉬움을 안고 걸어볼까도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차가 지나가면 무참히 바닥에서 짓이겨질 것이다. J는 망설이는 나와는 달리 금방 쇠스랑으로 나뭇잎 모으고 있다.

    "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그는 울타리 문을 열더니 계곡을 향해 맹렬히 은행잎 무더기를 밀어내고 있다. 계단마다 쌓인 잎들은 차 아래로, 더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아이에게 은행나무 소식을 전하니 주말 서울에서 만날 때 은행잎 몇 장을 간직했다가 자신에게 가져다줄 수 있냐고 했다. 아이의 아쉬움을 공감하며 은행잎을 골랐다. 책벌레를 막기 위해 이보다 좋은 건 없는 만큼 법정 스님의 책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과 실뱅 테송-'시베리아 숲에서'에 몇 잎을 넣어뒀고 아이에게 가져다줄 잎들은 따로 챙겨두었다.



    밀려나던 잎들은 맨 아래 계단에서 바로 계곡물속으로 쏟아지며 떠내려갔다. 물속으로 가라앉았던 잎들은 다시 떠올라 빙글빙글 돌다가 저만치 흘러가고 있다. 계곡의 물고기들은 놀라서 움직임이 부산하다.



    다 떨어진 은행잎에 망연자실하던 나는 계곡 아래로 내려가 은행잎의 떠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잎으로 뒤덮인 물속에 태양빛이 눈부시다.

"잘 가! 다시는 못 보게 될 은행나뭇잎들아~"

    내년에 다시 초록 잎이 피어나고 자랄 것이나 올해의 그 잎들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일 년 후 어떤 모습도 살게 될까? 나무의 굵기를 보면 우리 부부의 나이와 비슷하다. 그들이 가까이에서 살고 있어 다행이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은행나무 부부의 시를 옮겨본다. 


은행나무 부부   -반칠환 시인-

십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 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 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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