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후에 사업을 시작한 그는 번듯한 공장을 가진 사업가로 변해 있었다. 동대문시장에서 원단을 받아다가 그 위에 그림을 그려 납품하는 사업이었다. 야간작업을 해도 물량을 못 댈 정도로 바쁘게 돌아갔다. 그가 이런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침 그의 동창이 광장시장에 한복과 이불 그림을 대 주는 화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대 후에 동창을 찾아가 원단에 그림 그리는 일을 배웠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동대문시장에서 일거리를 받아다가 그림을 그려 납품하기 시작했다. 88 서울올림픽이 열리자 그림 주문이 폭주했다. 그 여세는 2002년 아시안 게임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중에 그에게 새로운 인연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몇 년 전에 피아노를 같이 배우던 여학생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어머, 아저씨는 웬일로 이 버스를 타셨어요?"
"집에 가는 길이지. 너는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저 이제 학원에 나가요."
그녀는 어느새 졸업을 하고 학원 강사로 사회생활을 하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 있었다. 마침 그녀가 다니는 학원도 그의 화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녀는 그의 이상형이었다. 늘씬한 외모에 밝고 시원시원한 성격이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말괄량이 같던 소녀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그는 그녀를 놓칠세라 차를 사서 아예 퇴근시간이 되면 학원 앞으로 그녀를 데리러 갔다. 그렇게 정성을 들인 탓인지 그녀가 임신을 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유산을 할 작정으로 병원을 찾아가기도 했지만, 마음이 약한 그녀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집안에선 난리가 났다. 그와 그녀는 죽을죄를 지은 죄인들처럼 그녀의 집에 끌려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한탄을 하던 그녀의 부모는 그의 부모를 만나 결혼을 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그들은 딸을 낳았고 그 이듬해에 결혼식을 올렸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딸을 낳고 결혼까지 하여 경사가 겹친 그의 집안에 암울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아버지가 폐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의 가족은 모두 망연자실해졌다. 어찌할 겨를도 없이 그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을 했다. 암 선고를 받고 6개월도 지나지 않아 그의 아버지는 그토록 그리던 고향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의 가족을 더욱 놀라게 한 사건은 그의 아버지 유산을 정리하면서 벌어졌다. 유산 상속을 하기 위해 제적등본을 떼어 본 그의 가족들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이 남한 땅에는 그의 아버지의 친인척이 하나도 없다고 알고 살았던 가족들이었다. 그런데 이북에 있다고 믿고 있던 그의 배다른 누나가 제적등본에 버젓이 올라 있는 것이었다.
그는 놀람 반 설렘 반의 심정으로 그녀를 찾아 나섰다. 그녀의 마지막 주소지는 춘천이었다. 그는 그때서야 그의 아버지가 막 발전하기 시작하던 분당 땅을 팔고, 척박한 이 가평 산골로 이사 온 연유를 알 것 같았다. 이북에 남겨 두고 왔던 어린 딸과 본처가 그를 찾아 남한에 내려와서 이곳에 살고 있었으니 그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마 같이 살지는 못해도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으셨으리라 짐작이 갔다. 그런데 막상 그의 엄마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서둘러 춘천에 있는 그 누나의 집을 찾아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집안에서 누군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막 문을 열고 무슨 일이냐고 묻던 그녀와 그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의 아버지의 모습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어찌 그렇게 그의 아버지를 닮았는지 부인할 수 없는 그의 피붙이였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말쑥한 차림의 사내 얼굴엔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서로 두 손을 마주 잡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가 말을 뱉었다.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을 보니, 아버지가 기어이 돌아가셨나 보구나.”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미처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너희들이 나의 존재를 모르는데 어떻게 나를 찾겠느냐.”
“그래, 아버지는 어디에 모셨느냐?”
“설악이라는 곳에 모셨어요. 북쪽을 향해서요.”
“잘했구나. 아버지는 끊임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라셨으니…”
두 사람은 망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서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