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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우라 고리유 Dec 31. 2019

2001_비 오는 날, 홀로 생각하는 어떤 것(2)

좋지도 나쁘지도 고통스럽지도 괴롭지도 슬프지도 허무하지도 않다.

‘우르르 쾅쾅’     


 오신의 육체는 매우 심심했다. 이미 에스프레소 잔에선 설탕이 굳어있었다. 단단해진 설탕을 혀로 겨우내 햝지 않는 한, 찻잔을 갖고 어떤 행위를 해도 어색했다. 손이 어색하니, 헛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기침을 하면서 카페를 살폈다. 흠뻑 젖은 커플이 다른 손님들에게 민폐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았다. 깨끗히 청소해 놓은 거실바닥을 조심스레 걷듯, 깡총걸음으로 카페 매대 앞에 서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꽤나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다.     


“천처히 시키셔도 돼요. 비가 너무 많이 오죠?”     


 매대 앞에선 털북숭이 같은 아저씨가 이들의 모습을 귀엽게 쳐다본 듯 하다. 그는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리고선 매대 바로 옆에 놓인 아이폰 도킹 스피커를 조정한다. 쳇 베이커의 '마이 퍼니 발렌타인(my funny valentine)’을 튼다.     


 털북숭이 사장의 취향에 오신이 깜짝 놀란다. 편안한 미소를 가진 털북숭이 사장이 오신과 눈빛인사를 하더니 "이 곡 아시나 봐요?"라고 묻는다. 웃음에 인색한 오신은 당황해하며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에요"라며 느닷없이 고백한다. 비 오는 날, 쳇 베이커를 만났으니 어쩔 수 없이 황홀경에 빠진 것이다.     


 짧은 대화였지만 털북숭이 사장님은 오신의 표정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표현이 어색한 사람일수록 쉽게 간파당할 수 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사장은 오신 같이 얼굴선이 깨끗한 사람일수록 감정에 거짓이 없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오신을 귀엽게 생각했다.     


 오신은 털북숭이 사장이 자신을 눈 여겨 보고 있었다는 것 눈치챘다. 오신의 가슴이 '철컹'하며 주저앉았다. 더이상 찬솔과 한맥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찬솔의 이민 이야기와 한맥의 BMW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쳇 베이커와 에스프레소 그리고 장마를 동시에 경험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조건은 언제든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라 크게 흥분되진 않았다. 쳇 베이커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속궁합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재즈궁합이라는 속설도 있지 않았던가. 오신은 낭만적인 사람이었지만 감정을 어떻게 내비칠지 몰랐다. 


 감정을 내비칠 수록 정신이 혼미해지는 자신을 굉장히 혐오했다. 누군가 나타나 자신을 흔들어주길 바래왔던 터였다. 그런데 이걸 털북숭이 사장이 이루게 가능케 해줄 것 같았다. 큰 흥분을 느꼈다. 홀로 아는 떨림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소중한 사랑의 감정이었다. 평생 감정을 숨겨왔던 기질은 이렇듯 절정의 순간에서 더욱 강력하게 작용됐다.      


 털북숭이 사장은 굉장히 트렌디한 모습이었다. 포마드 헤어스타일에 구레나룻과 턱수염을 연결시켰고, 콧수염에 살짝 윤기가 나는 걸로 보아선 왁스로 다듬어 줬던 것이 분명했다. 얼굴은 가지런하게 정돈됐다. 눈썹마저 빗질을 통해 정리한 것 같았다. 수염이 얼굴의 어떤 라인까진 허용되야 하는지 경계선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듯 했다.      


 목 뒤편에 슬며시 튀어나온 뱀머리 문신 또한 일품이었다. 아마도 등에서부터 똬리를 틀며 목 부분까지 올라온 것이 아닐까. 손가락 10마디에는 모두 문신이 있었다. 오신이 그와 대략 3m정도 떨어져 있기에 손가락 마디마디에 있는 문신까지는 쉽사리 파악할 순 없었다.     


“여기 처음 오셨나요? 제가 왠만한 손님들은 다 기억하거든요. 여기 서비스요. 당근 케이크인데 한번 드셔보세요. 제가 만들었어요.”     


 폭우가 잠시 머졌다. 사장은 오신 외 2명이 모인 창가 좌석에 다가가 케이크를 건넸다. 물론 오신과 눈이 마주친 이후였다. 오신은 크게 기뻐했고, 찬솔과 한맥은 어색하게 감사하다고 외쳤다. 분명 오신은 찬솔과 한맥과는 다른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장과 오신만이 느낄 수 있는 애정이었다.     


 가까이서본 사장의 얼굴에 오신은 설렜다. 나무향이 짙게 나는 그의 몸덩이에서 또다른 흥분을 겪었다. 오신은 사장의 몸덩이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사장의 등판에는 뱀이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분명 배 혹은 가슴 쪽에 레터링이 박혀있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했다. 케이크를 가져다 주면서 셔츠 단추와 단추 사이에 비친 틈에 또 다른 문신이 새겨져있다는 것이 단서였다.     


 귀여운 손님 탓에 털북숭이 사장의 두뇌회전이 빨라졌다. 물론 당근 케이크는 그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거짓말이었다. 단, 어떻게 해서든 귀여운 손님에게 눈빛 한번 정도는 주고 싶었다. 마침 날씨가 좋았다. 육안으로 축축함이 느껴질 정도로 습한 바깥 날씨는 카페를 매우 돋보이게 만들었다. 털북숭이 사장은 알고 있었다. 마음을 훔치려면 지금보다 더한 기회는 없다는 것을. 게다가 쳇 베이커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지 않은가. 찬스인 것은 분명했다.     


 문제가 있다면 그가 가진 감정의 충실함 정도였다. 본인이야 고백에 대해 크게 어려워하지 않지만, 상대가 충격을 받을 수도 있는 터였다. 그의 눈으로 바라본 오신은 순한 사슴에 가까웠다. 잘생긴 이목구비는 아니지만 잘빠진 몸매에 깔끔한 머리스타일 그리고 나름대로의 남성성을 위해 검은 뿔테를 착용하고서 블랙진에 블랙 티셔츠를 입은 오신이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다. 도대체 얼마나 예민하길래 검은색으로 자신을 감추고 싶어했을까. 전(前) 애인이 생각났다.     

 

 털북숭이 사장이 사귀었던 전 애인은 죽어버렸다. 6년 전에 자살했다. 그의 탓이었다. 그는 전 애인과의 사랑을 숨겼다. 성공이 먼저였고 안정감이 필요했다. 세상에 살기 위해선 수비적인 태도가 더 훌륭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사장은 그저 아무개의 시선을 두려워했다.     


 사실 털북숭이 사장은 병원에 들어가려던 의사였다. 허나, 사랑을 잃어버린 뒤, 인생이 바뀌었다. 전 애인이 자살한 것 이후 부터였다. 그는 스스로를 증오했다. 더군다나 전 애인의 장례식장에서 자신을 떳떳하게 소개할 수 없었던 사실이 부끄러웠다. 어느 곳에 가든 매력적이던 자신이었는데, 애인의 장례식을 몰래 훔쳐봤던 자신을 혐오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천박하게 보냈다. 인생의 졸작 중 하나였다.      


 만약 전 애인이 하자는 대로, ‘애인의 부모님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고백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당시 의대생이었던 사장에게 사랑 또한 명예로워야 했다. 좋은 커리어를 위해서 평생을 살아온 ‘그’였기에 불명예로운 부분은 가능한 도려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세워 놓은 명예로운 인생탑이 흔들리다 무너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의 경우엔 답이 없었다. 도려낼 수 없는 영역이었다. 감정이란 합리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설사,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소용없었다. 사랑은 참으로 정신없는 것임이 분명했다. 판단과 예측을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저 일분일초를 성실히 느껴가야하는 지난한 종목이었다.     


 결과적으로 사장은 ‘사랑’을 숨겨야 했다. 도려내기엔 너무나 큰 불행이 찾아올 것 같은 두려움에서 였다. 또한 도려낼 이유가 딱히 존재하지도 않았다. 애인에게 주고싶은 사랑은 명확하게 존재했고, 그로 인해 자신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은 배로 불어났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사장은 그것을 몰래 즐기는 상황이 좋았다. 소중함은 배가 되고, 만남의 의미는 더욱 드라마틱해지니 효율면에서는 항상 최상치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전 애인은 항상 자기가 혼자인 것 같다고 말했다. 패션을 전공한 전 애인은 의대생이었던 사장에게 기념일마다 옷을 만들어주곤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는 털이 있으면 진짜 섹시할 것 같아. 근데 못 기르지?"였다. 수염이 본인과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무심코 하곤 했다. 물론 의대생에게 '수염'은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의대생이던 사장은 이를 쉽게 무시했고, 그를 위해 수염을 길러주지 않았다.     


 그러다 전 애인이 죽기 마지막 날. 병원 레지던트 생활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이날 의대생이던 사장과 전 애인은 모텔서 조촐한 축하파티를 하려했다. 전 애인은 사장을 놀라게 하려고 모텔 방을 예쁘게 꾸몄다. 패션 디자이너인 애인은  감각이 뛰어났다. 애인은 방안에 장미를 듬뿍 쌓아놓고, 검은 가죽 바지만 입은 채, 의대생이던 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색과 붉은 색을 좋아하던 애인의 취향을 완벽히 고려한 섹시 콘셉트였다. 전 애인에게 있어 이날은 애인의 힘들었던 레지던트 생활이 끝났음을 축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거라는 자축의 자리였다. 비록 힘들게 사랑하지만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열렸던 것이다. 전 애인은 이날 자리를 소중히 생각했고, 공식적으로 프로포즈 또한 할 생각이었다. 결혼반지도 준비해뒀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둘을 허락하지 않았었나 보다. 폭우처럼 쏟아진 장마 탓에 병원에 수해(水害)환자들이 급증했다. 의대생이던 사장은 이날 병원에 밀려온 응급환자 수십 명을 처리하느라 24시간을 소비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만 기다리던 애인의 마음은 묻어버린 채 말이다. 결국 그는 전 애인의 독촉 전화에 화를 냈다. 입에 담지 말아야할 말을 했다. 서러웠던 전 애인은 다짜고짜 환자와 자신 중에 한 명을 살리라면 누굴 선택할 거냐고 물었는데 그가 애인에게 비수를 꽂았다.     


 “당연히 환자지. 어차피 '너' 나 없으면 못 살잖아.”     


 의대생이던 사장은 당시 자신이 뱉은 말들을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극도로 피곤한 스트레스 탓에 이성을 잃어버렸던 순간이었다. 당장의 상황정리가 우선이었다. 이득이 되는 방향이 정해진다면 충격파가 있더라도 무시해버리기 쉬운 몸상태이기도 했다.     


 “그냥 오늘은 내가 응급환자하면 안될까?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자기도 알잖아. 오늘부터 우리 사이 공개하는 날인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매번 숨어서 만나는 것도 진짜 힘들어. 매번 아무도 안 보는 공간에서만 데이트 하는 것도 지겹고. 자기랑 있으면 너무 좋은데. 그것만 빼면, 나 혼자 이 지구에 혼자 사는 것 같아.”


“왜 그래.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닌데. 이따 새벽에 들어갈게. 먼저 집에 들어가 있어. 자꾸 그러면 나 화낼거야.”


“싫어. 지금 당장 와. 안 그러면 나 더 이상 못 볼 거야. 나도 자기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솔직히 말해서 한국에서 우리같은 커플이 어떻게 오픈하며 살어. 그거 진짜 욕심이고 사치야. 물론 내가 레지던트가 끝나면 조금 독립적일 순 있겠지만 그래봤자 우리는 숨겨야 할거야. 자기도 알잖아. 왜 자꾸 우리 사이를 밝히는데 집착하는 거야? 우리 둘이 사랑하면 그만이잖아.”


“알겠어. 그럼 내가 응급환자 되면 만나줄거야?”


“자꾸 헛소리 하지말고. 끊어. 이따 상황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 사랑해.”     


그게 그들 대화의 마지막이었다. 의대생이던 사장은 목 매달고 자살한 애인의 부고 소식을 경찰 전화를 통해 접했다. 하루가 지난 뒤였다. 경찰이 자살한 남자 휴대폰에 하트 이모티콘이 표시된 본인 연락처에 연락을 한 것이었다. 충격을 받는 그는 말을 잇지 못했지만 한가지 확실한 대답을 경찰에게 넘겼다. 그는 경찰에게 "정말 아끼던 동생입니다"라며 끝까지 사랑을 숨겼다. 이로서 그의 끝사랑은 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6년이 흘렀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던 그는 카페를 차리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죽은 애인의 바람이기도 했던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전 애인의 말마따나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수염이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해줬고, 방문한 손님들 조차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싶다면서 같이 사진 좀 찍어고 되겠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날이 갈수록 카페는 유명세를 타게 됐고, 털북숭이 사장에 대해 호감을 갖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사랑을 피했다. 더 이상 전 애인과 같은 일을 겪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특정 대상과의 깊은 만남을 피했다. 일종의 정신적 트라우마였다. 특히 패션 쪽에 일하는 남자일수록 피했다. 그런데 자기 가게 손님으로 온 오신을 보고서 당혹스러워 했다. 전 애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시크한 척 보이지만 영락없는 귀염둥이의 모습이었다. 마음 속에서 전 애인과 오신의 모습이 오버렙 되기 시작했다. 6년만에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힘들었던 기억과 좋았던 기억들이 폭력적으로 그의 머리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에스프레소 원액을 내리고 있던 그의 손동작은 점점 무뎌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멈췄고, 손님들 분위기를 재고 있던 눈빛이 창가를 향해 멈췄다. 비가 다시 폭우처럼 쏟아졌다.      


‘우르르 쾅쾅’     


 카페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어우'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광경을 지켜봤다. 단 한 사람만 뺴고 말이다. 아무것도 시키지않고 눈치만 보던 노인이었다. 잠시 비만 피하려던 늙어버린 노인이 문가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세련된 카페에 낡아빠진 개량한복을 입은 노인이 등장하기란 쉽지 않다. 어느 누가 보아도 늙어버린 노인은 이곳 방문자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늙어버림을 상징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흰 머리, 틀니, 누리끼리한 삼베옷, 2G 폰 등이었다. 게다가 걸음이 매우 불안정해보였다. 그의 발걸음은 건강해보이지 않았다. 관절 하나하나에 큰 힘을 주며 걷는 느낌이었다. 걷는 것조차 아찔한 느낌이었다. 말 그대로 노약자(老弱者)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생명력을 잃은 몸짓으로 그저 카페 문 앞에서 서성거릴 뿐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유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도 알고 있었다. 사실 그의 원래 계획은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비가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불현 듯이 마누라 생각이 났다. 이미 죽어 없어져 버렸지만 말이다. 그래도 사진은 남아있었다. 그가 2G 폰을 가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식 없이 둘이서 오손도손 살던 지난 17년의 결혼 생활은 너무나 짧았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너무나 허망한 것이었다.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무엇인가 기억하려고 하면 잘 기억해내지 못했다. 육신은 반비례적으로 너무나 빨리 죽어갔다.     


 세탁소를 운영했던 늙어버린 노인은 50살까지 혼자 살다 뒤늦게 세탁소에 손님이던 과부와 눈이 맞게 된다. 서로 외로움에 능숙하게 대처했던 터라, 이들의 사랑은 시간이 지남과 상관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만나자마자 서로를 위해 존재하게 돼 버렸다. 17년 동안 이들은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마치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기라도 약속한 것 마냥 모든 것을 함께 했다. 그렇게 만난 이들은 서로를 위로해주기에 바빴다.      


 미망인이었던 아내 또한 한없이 다정한 세탁소집 아저씨에게 모든 사랑을 주고파 햇다. 미망인이었던 아내는 자식을 갖지 못한 자신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남편에게 헌신적이었다. 고아 출신인 남편 또한 미망인이었던 아내에게 무조건 적인 사랑을 방출했다. 서로 가진 것이 없던 이들이기에 가볍게 전하는 미소나 감사함 등이 이들 사이를 더욱 빛나게 혹은 소중하게 만들었다.     


 2G폰에는 그녀와 함께 갔던 베트남 여행 사진이 가득했다. 경리단 근처 카페들이 줄지어 서게 되면서 세탁소 건물집 주인이 임대료를 3배나 올리게 됐고. 이에 못이긴 노인이 세탁소를 접으면서 아내와 여행을 떠나게 된다. 노인은 그때 자신의 말투를 기억하면서 살짝 미소를 짓는다. 그는 "어차피 죽어 없어질 텐데, 다리 멀쩡할 때 뱅기라도 타 봐야하는거 아니유?"라며 아내를 웃겼던 기억을 되살렸다. 아내는 다 청산하고 베트남 여행을 가자는 남편의 호방함에 미소 짓곤 했었다.     


 사진 속에선 아직 까지 멀쩡한 자신의 몸과 아내의 미소가 가득했다. 쌀국수를 먹으며 찍는 기념사진, 호치민 박물관에서 전통복을 입고 찍은 사진. 인력거에서 찍은 사진. 코끼리 위에서 찍은 사진 등 수 십장이 놓여있다. 늙은 노인은 2G폰 특유의 작은 화면에 어렴풋이 보이는 사진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을 보았다기 보단 사진 속 추억이 떠올랐던 터였다.     


 어느새 비가 다시 그쳤다. 구름이 걷히고 따가운 햇빛이 카페 안에 침투해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안심하던 커플은 서로 쳐다보기만 해도 바빴다. 남자는 젖은 여자의 손을 어루만지며 어떻게든 빨리 말려내겠다며, 냅킨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있고, 여자는 남자가 멋지게 넘긴 헤어스타일이 비 때문에 가라앉은 것이 속상했는지 머리카락을 붙잡고서 고민 중이었다.     


 서로의 모습이 웃기다는 듯 미소 짓는 이들을 보고 있던 한맥은 '예전 여자친구와 이랬던 적이 있었나?'하며 부럽다는 듯이 몰래 훔쳐본다. 즐거웠던 추억은 꽤나 사소한 곳에서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찬솔은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할아버지가 다시 미소를 보이자 괜시리 안심했다. 할아버지라는 존재를 가져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더욱이 늙은 남자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터였다. 처음에 그가 할아버지를 보았을 때, 즉 문 앞에서 축축해진 옷을 털고 있던 늙은 노인을 볼 때만 해도 그는 괜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늙음'이 얼마나 무겁고 못생긴 짐인지 느꼈던 것이다. 그러다 다행히 그가 휴대폰을 들고 웃고 서 있는 모습에서 안도를 느꼈다. '늙음' 속에서도 '즐거움'과 '유쾌함'이 공존해 있을 거란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크게 한 숨을 쉬고서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아댔다.     


 오신은 털북숭이 사장이 건내 준 케이크를 조금씩 긁어먹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긁어먹고 있었다. 그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당근 케이크이 아니라 털북숭이 사장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었던 것이다. 쳇 베이커를 틀어준 그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야 할까 아니면 내일 다시 한 번 이 카페에 와야 하나? 내가 이성애자인가 아니면 동성애자인가? 혹시 내가 털을 좋아하는 취향인가 따위를 생각했다. 달콤한 당근 케이크는 거들이었을 뿐, 그의 머리 속에 가득한 생각은 털북숭이 사장에 대한 애정 뿐이었다.     


 털북숭이 사장은 턱을 괴고선 몽상에 빠졌다. 비가 그치면서 서서히 길거리 행인들이 많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홀로 이죽거렸다. 정신병자처럼 웃기도 했다. 사실 그는 지금 전 애인의 마지막 전화 그리고 위급했던 응급실 상황을 다시 한 번 기억해내려 애쓰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시 쓰는 중이다. 애인이 온 신경을 쓰며 모텔 방을 꾸미는 사이에 사장이 그에게 전화를 걸며 따듯한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전하는 상상을 한다. 애인은 "빨리 와! 보고 싶다"며 응답한다. 사장은 의대생이던 모습으로 완벽하게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선 홀로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게. 즐겁게 사는 우리 모습 말이야'라며 읊조렸다.     


 다시 비가 쏟아져 내린다. 

 모두가 창문을 바라보며 비를 쳐다본다. 

 각자가 생각하는 ‘어떤 것’들을 되뇐다. 

 홀로 생각하는 것들이다.


 다시 비가 쏟아져 내린다. 

 모두가 창문을 바라보며 비를 쳐다본다. 

 각자가 생각하는 ‘어떤 것’들을 되뇐다. 

 홀로 생각하는 것들이다.

 

 다시 비가 쏟아져 내린다. 

 모두가 창문을 바라보며 비를 쳐다본다. 

 각자가 생각하는 ‘어떤 것’들을 되뇐다. 

 홀로 생각하는 것들이다.


 다시 비가 쏟아져 내린다. 

 모두가 창문을 바라보며 비를 쳐다본다. 

 각자가 생각하는 ‘어떤 것’들을 되뇐다. 

 홀로 생각하는 것들이다.




위 내용의 저작권은 저자  '동지호' 에게 있습니다. 해당 내용을 불법배포하지마시고, 원작자에게 문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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