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캠핑
한 권의 책,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된 여행이다. “태즈마니아에 가고 싶어.” 갈 수 있다고 상상하지 않았다면 말로 꺼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여행. 어떤 상상과 하나의 말이 미래를 만들어 낸다.
캠핑이 시작되고도 마음은 오락가락했다. 생각지 못한 상황과 환경에 당혹스러웠다. 불편한 잠자리, 쾌적하지 않은 화장실, 내 책상이 없고 홀로 고독해질 수도 없는 여건. 어떤 면에서는 홀가분한 대신 어떤 면에서는 꼼짝도 할 수 없어 답답했다. 짐을 싸 집으로 돌아가는 시나리오도 여러 번 써 보았지만, 그러는 중에도 시간은 꼬박꼬박 흘렀고 ‘태즈메이니아’라는 단어가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여기까지 왔으니 태즈메이니아까지 가 봐야지.'
집에 가고 싶은 마음도 ‘태즈메이니아’라는 단어 앞에서는 맥을 추리지 못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알고 싶다는 마음이 편안함과 익숙함이라는 벽을 부수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캠핑, 이국의 땅에서 보내야 하는 한 달이라는 기간은 내게 변화를 요구했다. 여행의 일상에서 날마다 허물을 벗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효용에 사로잡힌 관념, 쾌적하고 편리함을 갈구하는 마음, 지금 없는 것을 바라는 헛된 욕망을 지웠다. 대신 눈앞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세상이 얼마나 거대한지,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무력하고 하찮다는 게 얼마나 자유로운 일인지, 마음을 비우면 얼마나 즐거워지는지. 더디게 배우며 알아가고 있다.
삶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지속하고 싶다. 내면의 중심은 견고히 하면서 자아를 한정하는 울타리만은 헐겁고 유연하게 만들어야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일을 하면서 삶의 중심은 다질 테지만 틀에 박힌 역할이나 위치, 생각에서 달아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상상할 것이다. 삶이라는 여행에서 호기심 많은 탐험가가 되겠다는 자세와 어디서든 즐거움을 발굴하는 용기만은 잘 챙겨야겠다.
눈을 뜨면 새해가 밝는다. 나이는 한 살을 더 늘겠지만 숫자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다. 깨끗한 새 달력을 펼치듯 채워지지 않아 가능성으로 가득한 삶이 열린다. 삶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나갈 또 하나의 기회.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될지,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몸을 움직이는 방향으로 삶은 흘러갈 것이다.
지난해의 마지막 태양과는 배 위에서 작별했다. 멜버른에서 태즈마니아 데본 포트로 향하는 거대한 유람선 위에서. 다음 날 눈을 떠 보니 태즈메이니아에 도착했다. 마음에 품었던 대상이 눈앞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기쁨이 차올랐다. 새해의 첫 태양을 태즈메이니아에서 맞는다니 감격스러웠다. 오랫동안 꿈을 꿨던 곳도 아닌데, 바람결에 날아온 나뭇잎을 줍듯 우연히 선택했는데, 이토록 선명하게 낯선 미래에 도착했다.
항구 근처 바닷가에서 아침을 먹고 해안을 따라 언덕을 이룬 길을 산책했다. 날이 흐려 쌀쌀하고 바람도 꽤 불지만 시작의 산뜻함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수풀에서 태즈마니아에서만 산다는 캥거루처럼 생겼는데 크기가 작은 왈라비라는 동물을 만났다. 놀이터에서 만난 현지인은 이렇게 날이 흐려도 자외선이 강해 선크림이 필수라고 알려 주었다. 연중 선선한 날씨, 언제든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곳.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태즈메이니아에서는 강렬한 빛 덕분에 익숙한 장면에서도 채도가 다른 색을 보게 되진 않을까 기대되었다.
고도를 높인 해가 바다 위로 빛을 뿌렸다. 물결 위에서 속살거리는 윤슬이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해안으로 밀려와 부서지고 스며드는 파도. 파도가 간지럽힌다고 와글와글 웃어 대는 해변의 돌멩이들. 스며들고 흩어지는 가볍고 흥겨운 마음들. 이런 마음으로 새해를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경계를 허물고 스며드는 마음으로. 자잘한 기쁨에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넓게 가슴을 펼쳐 보자고. 불어오는 바람에 웅크리는 대신 훌쩍 그 위로 올라 타 보자고.
“달을 바라볼 때마다 지금 걷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달까지 걸어갈 수는 없겠지만, 달까지 걸어가는 사람인 양 걸어갈 수는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달까지 걸어가는 사람인 양 걷는 사람의 발은 달에 닿아 있습니다.”
-김연수
달까지 걸어가는 사람처럼, 지금 이 순간 달에 발이 닿은 것 마냥 걷는 사람처럼, 순간을 살아야지. 낯선 것을 기쁘게 맞이하고 조금 더 용기 내어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불가능해 보였던 이곳에 내가 서 있게 된 것처럼 나를 에워싼 원의 경계를 한 뼘 늘려 보고 싶다. 상상하는 만큼 커질 것이다. 걸어가는 만큼 넓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