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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Apr 05. 2024

어떤 홀연한 시간

소설같은 장면





엄마를 만나 대공원으로 벚꽃을 보러 갔다. 대공원 벚나무가 이토록 크고 풍성했던가. 집 앞 공원에 있는 벚나무를 보고도 아름답다 감탄했는데 이곳의 벚나무는 그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 키가 크고 꽃이 촘촘하게 풍성하다. 그런 나무들이 줄지어 섰다. 현실에서 비현실로 향하는 길. 순백의 환희가 나를 감쌌다.


어릴 적 이맘때에도 엄마, 아빠, 언니와 동생들과 이곳으로 벚꽃 구경을 오곤 했다. 꽃만큼 사람이 많았고 공기가 술렁였다. 그땐 꽃에 감탄하기보다 평일 저녁에 온 가족이 나들이를 한다는 그 특별함에 신이 났었다. 그때는 꽃의 아름다움을 몰랐으니까. 잠시 왔다 사라지는 그 아스라함이, 매번 우리를 애타게 할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 밤에도 꽃 좀 보라고 고개를 위로 향한 나와 달리, 딸아이는 그저 뛰어놀고만 싶어 했고. 벚꽃 만개해 희붐하게 빛나는 나무들이 에워 싼 잔디밭. 그 아래를 잠잠히 거니는 대신 술래잡기를 하며 부산하게 뛰어다녔다. 엄마와 나, 그리고 딸아이. 셋은 숨을 헐떡이며 달리다 "얼음!", "땡!"을 외쳤고. 허리춤에 두 팔을 붙여 종종 달려 나가던 순간 엄마의 얼굴은 영락없는 개구쟁이, 너른 잔디밭을 가로지르며 날렵하게 달음박질치던 아이의 몸놀림은 날다람쥐.


좋은 순간은 짧게 우리를 스쳐 간다. 봄날의 꽃처럼. "금세 져 버렸다. 너무 빠르게 가버린다.”는 엄마의 말처럼. 인생의 봄도, 인생의 꽃도 빠르게 왔다 흩어진다. 하지만 어제는 언제든 다시 돌아온다는 걸 깨달았다. 해마다 봄이 되돌아와 꽃을 피워내고, 그 앞에서 우리가 처음 본 양 감탄하듯이. 우리도 그처럼 되돌아온다. 나 아닌 무언가로, 당신에게로, 나무와 꽃, 흙과 그 아래 작은 생명체, 혹은 바람, 어쩌면 저기 높은 곳의 별로.


사는 게 지옥 같다가도 꽃처럼 피어나는 환희의 기쁨을 마주한다. 언제 그렇게 고통스러웠나 싶게, 눈앞의 부신 아름다움에 마음은 다소곳해진다.


가로등 아래 유령처럼 스스로 빛을 내며 서 있는 벚나무가 홀연히 시선에 잡혔을 때 나는 잠시 아득해졌는데. 시공간을 넘나드는 기분에 울렁거렸는데. 달음박질을 하다 우뚝 멈춰 선 십여 초의 시간. 아이가 뛰는 모습에서 유년을 다시 보고, 늙은 엄마의 얼굴에서 언젠가의 나를 보고. 엄마도 나의 딸과 나를 보며 그런 기분에 젖었을까.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시절이 동시에 살아가는지.  


과거와 현재와 미래, 심지어 내가 직접 살지 않았고, 내 삶에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은 순간마저도 혼재하여 드러난다. 벚꽃이 흰 빛을 보내는 찰나에는, 어떤 홀연한 시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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