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를 끌어안기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올 여름의 인생 공부> 최승자
새로울 게 뭐 있나 싶을 때가 많다. 달관한 것처럼, 도통한 것처럼, 다 아는 것처럼. 그건 썩을 일 밖에 남지 않은 참외 같은 거라고 시인은 말했는데. 수시로 그런 마음이 든다. 하지만 실은,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처음 보고 처음 겪는 일이 여전히 많다. 아이의 영구치를 보는 건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으니.
치과 검진 가는 날, 딸아이는 처음인 것처럼 겁을 냈다. 이미 여러 번 다녀왔지만 치과는 갈 때마다 새롭게 무서운 곳이다. “엄마도, 지금도 치과 가는 건 무서워”, 하며 아이를 달래 주었지만 아이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아이의 이름이 불렸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아이가 진료대에 눕자 엑스레이 사진이 보이는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밖으로 나온 이의 뿌리 아래 작은 방처럼 동그라미가 늘어서 있고 그 안에 한 개씩 또 다른 이가 들어 있었다. 다글다글 모여 옹기종기 둥지를 틀고 있는 이들. 보이지 않는 그 속에 집을 짓고 기다리고 있는 이가 보였다. 영구치였다.
처음엔 이게 뭐지 싶어 놀란 눈으로 쳐다보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선생님은 사진 찍어도 된다며 명랑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가 정상적으로 다 있네요. 간혹 개수가 모자라기도 하는데 서윤이는 개수 딱 맞춰서 잘 있어요.” 몇 년 사이 사라질 아기 이와 새로운 탄생을 준비하고 있는 어른 이들.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찰칵, 사진에 담았다.
이런 건 처음 보는 일이다. 유치 뿌리 아래 이미 모양을 갖춰 다글다글 집을 짓고 있는 영구치라니. 상상도 못 했던 모습이다. 이렇게 미리 준비하고 있다 때가 되면 밖으로 나오는 거였구나. 언제부터 거기 있었니... 알 속에서 껍질이 깨어지길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동그라미 집에서 작은 이들이 잠자고 있었다. 아이의 이가 빠지면 숨어있던 이들이 하나씩 올라오겠지. 기다렸다는 듯 퐁퐁 솟아오르겠지.
작년부터 친구들 중 이가 빠지는 아이가 있어 딸 아이에게도 유치가 빠지고 영구치가 올라올 때가 되었구나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구치가 어디서 어떻게 있다 나오는지는 몰랐다. 손가락에 상처가 생기면 천천히 새살이 돋듯, 빈자리를 메꾸듯 이가 자라겠지 생각했다.
아래쪽 앞니부터 빠질 거라며 이를 확인하던 선생님이 조금 흔들리는 이를 찾아냈다. 그리고 물었다.
“몇 월 생이죠?”
“5월이요.”
“그때까지는 빠지지 않을 것 같아요.”
아이의 여섯 번째 생일 즈음엔 처음으로 이가 빠질 것이다. 우리는 숨어 있던 새 이가 용감하게 밖으로 나오는 걸 목격하겠지. 동그란 집 속에 꽁꽁 숨어 있는 이를 미리 보았으니 설레며 지켜볼 것 같다. 반가운 얼굴 기다리듯 날을 꼽을 테다.
입 안 제일 안쪽에서는 아직 나오지 않은 새로운 어금니가 자라고 있다고 했다. 머지않아 올라올 거라고 선생님은 말했다. 어떤 이는 빠지고, 어떤 이는 아직 자라고 있고. 이가 나고 빠지고 자라는 일에도 순서가 있고, 적당한 때가 있다니. 아이의 모든 성장이 그럴 테지만, 손톱만큼 작은 이들도 알아서 때를 준비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언젠가 나도 다 거쳐온 일이지만, 모르는 채 겪었고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탕을 먹다 앞니가 쏙 빠졌던 일, 시장통을 걸어 들어가면 있었던 작은 치과, 치과 갈 때마다 엄마가 사주었던 바나나맛 우유. 그런 게 하나 둘 떠오른다. 문을 열면 확 끼쳐오던 소독약 냄새, 윙-하고 요란하게 울리던 기계 소리. 매번 그게 너무 싫고 무서웠던 기억이.
입 안에 나란히 늘어선 낡은 이들도 한 때 동그라미 집에서 잠을 자다 나온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내게도 그렇게 작고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게. 치료를 받느라 눈물을 훌쩍거리다가도 바나나 우유에 헤시시 웃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분명 거기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지고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있다.
엄마 손 잡고 시장가길 좋아했던 아이, 좁다란 시장통이 너무 넓고 커다래 보여 눈이 휘둥그레졌던 아이. 무서워도 큰 소리 내지 않고 꾹 참던 아이, 싫어도 크게 내색 않던 순한 아이... 그 아이는 자라서 사라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 몸 어딘가에 다시 동그라미 집을 짓고 들어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때를 기다리며 잠을 자고 있지 않을까. 그러다 내가 아이처럼 웃을 때, 아이처럼 울 때, 아이처럼 두근거릴 때... 그 아이가 빼꼼 고개를 들지 않을까.
아이 키우는 일에는, 나 또한 매번 처음이다. 그래서 서툴고 실수하고 당황하지만, 그래서 신기하고 놀랍고 즐겁다. 자신의 처음을 겪는 아이 곁에서 엄마는 처음인 나도 아이처럼 울고 웃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약속대로 문방구에 들러 딸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을 사주었다. 아이는 콤팩트처럼 생긴 손거울을 골랐다. 겉면엔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고 그 안쪽으로 액체가 채워져 있다. 거울을 기울이면 액체 속 금가루와 작은 보석이 쏟아져 내렸다. 아이는 그걸 이리저리 기울이며 좋아했다.
헤시시 웃는 아이가, 입안에 숨기고 있는 다글다글한 이가, 반짝이는 금가루처럼 내게 떨어져 내렸다. 나도 아이처럼 커다랗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