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이저우 – 시장천호묘채西江千戶苗寨
구이양에서 카이리凯里까지 버스로 약 2시간 이상이 걸린다. 산길을 돌아 그 안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앉아있는, 검동남먀오족둥족자치주의 주도답게, 햇살에 반짝이는 먼지들처럼, 거리의 부산함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카이리’라는 포스가 느껴지는 멋진 마을 이름에서, 5세기 이후 고구려를 그 자신들이 고려 또는 고리라고 불렀던 그 ‘고리’가 ‘카이리’인 것만 같아 진한 녹색의 그늘이 드리운 이 마을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카이리는 먀오족의 옛 이름 ‘가뤼’와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버스터미널 상가 앞 계단에 앉아 ‘카이리’, ‘가뤼’를 거듭 뇌이다가 시장천호묘채西江千戶苗寨까지 가는 빵 차에 올랐다. 창틈으로 들어오는 산뜻한 공기가 구이양하고도 다르다. 산속으로 향하는 창밖 풍경을 훔치듯 보다 보니 금방 도착했다. 시장천호묘채 앞은 어디서 이렇게 모여들었는지 사람들로 북적북적, 역시 중국이다.
먀오족 이야기
“서기 668년에 멸망한 고구려의 유민 중 중국 남방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현재 중국 56개 소수민족 중 인구가 5번째로 많은 먀오(苗)족의 조상이다.” 10여 년 동안 먀오족을 연구해 온 김인희 교수가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저서(1,300년 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에서 밝혔다.
그녀의 저서 1,300년 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을 바탕으로 먀오족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먀오족苗族은 중국 윈난성과 구이저우성, 후난성과 동남아, 그리고 미주 등지에 퍼져 있는 소수민족으로 현재 약 1000만 명에 이른다.
“당은 왕족과 친당파 귀족들, 그 외의 일부 유민만 상도인 장안과 동도인 낙양에 안치했고 나머지 대다수의 유민들은 변경 여러 주의 공한처에 분산, 배치했다.”
668년 9월, 당나라 장수 이적은 고구려 보장왕 등 20만 명을 끌고 갔다. 이듬해인 669년 영주(현 라오닝 성 차오양 시)와 내주(산둥 성 옌타이 시 라이저우) 등에 잠시 머물렀던 유민들 중 빈곤하고 약한 자는 중국의 각 지역으로 흩어지도록 이주시켰으며, 힘이 있는 저항세력인 10만 이상의 유민들을 중국 남부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 태종 때 수립한 이민족 통치 책은, 항복한 민족은 고국에서 먼 곳에 배치, 내륙으로 이주시켜 노동력과 세금 확보를 위해 호적에 편입시켜 민족을 자연 소멸시키는 전략이었다.
이때 중국 남부의 오지로 끌려간 약 10만 명의 유민들은 역사서‘구당서(舊唐書)’와 먀오족에게 전승되는 사시(史詩)와 노래, 옷에 새겨진 문양 등을 종합하면 윈난에 터를 잡은 서부 먀오족과 구이저우 부근에 자리 잡은 동 중부 먀오족의 뿌리가 되었다.
중국 다른 소수민족들의 유구한 역사는 전부 알려져 있지만 송나라 문헌에 갑자기 가뤼족(먀오족)이 등장, 유일하게 송나라 이후에야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다. 가뤼(먀오족)는 고구려가 5세기 이후부터 나라 이름을 고려(또는 고리)라고 불렀던 말이 변한 것으로 보며, ‘먀오’라는 뜻은 야만인이란 뜻이다. 처음에는 한족을 제외한 모든 소수민족을 먀오라고 불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저항이 강하고 골칫거리였던 먀오(가뤼)족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비가 오면 최소한 3일간은 쉬지 않고 내리며, 어두컴컴한 숲이 이어지는 작은 평지 하나 찾을 수 없는, 사람이 살지 않던 곳으로, 이들은 황하와 장강을 건너 중국 남방으로 목숨을 건, 강제 이주를 당한 것이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609년~705년 사이 후난성 인구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시간만 다를 뿐, 스탈린이 중앙아시아를 개발하기 위해 러시아 한인들을 가족단위로 허허벌판의 중앙아시아에 강제이주시킨 것과 너무나 똑같다.
남방의 만리장성 ‘묘강변장苗疆邊牆’
명明나라(1368~1644) 초기 주원장으로부터 시작된 200년간의 먀오족 지역에 대한 군사 정벌은 300여 차례에 이른다고 한다. 그래서 윈난이나 구이저우를 다니다 보면 군사주둔지 마을이나 세워진 성곽들은 대부분 명나라 때 만들어졌다. 주원장 때부터 군사를 보내 마을을 이루고 사는 먀오족 마을을 침입하고 사람들을 죽였으며, 빼앗은 땅은 이주시킨 한족들에게 나눠주었다. 깊은 산속으로 쫒겨난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돌을 파내고 계단밭을 만들어 연명을 해야만 했다. 먀오족이 지금도 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이유이다.
명은 강인하게 저항하는 먀오족을 끝까지 제압하지 못하고 1615년 성을 쌓아서 먀오족이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고립정책을 썼다. 1615년에 시작해 8년간 20만 명이 쌓은 180Km의 성을 ‘묘강변장苗疆邊牆’ 이라 부르는데 명나라 변경에 있는 성이라는 뜻이다. 명나라가 실제로 국경으로 생각한 성이며 먀오족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그 유명한 장가계에서 멀지 않은 구이저우와의 경계에 위치한 후난성의 펑황鳳凰 근처에 있는 중국 남방의 만리장성이란 뜻의 남방장성(묘강변장)의 명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먀오족은 한인 지역에 들어올 수 없으며 한인은 먀오족이 사는 지역에 들어갈 수 없다. " 명나라는 북쪽의 오랑캐를 방비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은 것처럼, 남쪽의 먀오족을 대비하기 위해 당시의 국경선의 역할을 한 남방장성인 묘강변장을 쌓은 것이다.
2001년 복원된, 지금은 남방장성이라 붙여진 묘강변장苗疆邊牆 성곽 안쪽의 숙영지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바둑판을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 2년마다 한 번씩 중국과 한국을 대표하는 기사들이 대국을 펼친다고 한다.
중국 소설가 沈從文(1902~1988)은 변방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변성邊城’을 발표했다. 펑황鳳凰이 고향이며 어머니가 먀오족이었던 그의 집안은 먀오족을 관리하기 위해 파견된 군인 집안이었다고 한다. ‘변성邊城’은 추측컨대 지금의 남방 장성인 묘강변장苗疆邊牆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개토귀류, 즉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해 다스리는 직접통치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명대부터 시작한 개토귀류는 청나라(1616~1912) 때는 더욱 강화되었다. 현재 구이저우의 검동남먀오족둥족자치주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옹정 년(1722~1735) 간까지 중국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엄밀하게 중국 땅이 아니었으며 먀오족은 중국 사람이 아니었다.
청나라의 먀오족에 대한 탄압은 극도에 이른다. 마을을 점령하고 불태운 후 죽이고 몰아내거나, 둔전을 설치해 토지를 강제로 빼앗았으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것은 물론 다섯 살 이상의 모든 남자를 죽였다고 한다. 이때 먀오족의 70~80%는 죽음을 당했고 저항한 사람은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구이저우貴州와 후난湖南을 중심으로 일어난 건가기의(1795~1797) 이후에는 극심한 먀오족 말살정책으로 먀오족의 인구는 10분의 1로 줄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윈난과 태국 북부, 베트남, 라오스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된다. 지금도 동남아에 사는 약 100만 명의 먀오족은 몽족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으며 미국과 프랑스 등에 살고 있는 먀오족(몽족)도 수십만 명에 이른다.
18세기 초부터 동남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먀오족은 1960년과 1975년 사이 베트남 전쟁과 라오스 전쟁에 참가한다. 일부는 공산당을, 다른 쪽은 미국을 지지했다. 산악지형에 익숙한 먀오족들은 월맹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거나, 미군 포로들을 구해내는 일에 많은 공을 세운 듯하다. 전쟁이 끝난 후 미 중앙정보국(CIA)에 협력했던 먀오족은 유엔의 도움으로 미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아르헨티나, 가이아나 등 서방 각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라오스 왕국(라오스 친미정권)과 공산반군 사이에 벌어진 라오스 내전 때도 이들은 라오스 왕국을 지원하는 미국의 비밀 용병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베트남과 라오스 내전에 참가했던 먀오족(몽족)은 전체 남성 인구의 80%에 달했다. 1975년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군에게 항복하고 라오스까지 공산화가 되자 라오스 공산정권의 인종청소의 탄압 속에 살아남은 먀오족은 오늘날 밀림이나 오지로 숨어들었고, 탈출에 성공했지만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미 중앙정보국(CIA)을 도왔던 베트남과 라오스의 먀오족(몽족)은 어쩔 수 없이 대량 이주(미국으로 약 27만 명, 프랑스로 약 2만 명)를 하게 된다. 먀오족이 전 세계로 퍼진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던 민족의 역사를 안고 사는 먀오족이지만, 요즘은 결혼을 위해 중국 구이저우와 후난 등 고향을 방문하는 먀오족들이 심심찮게 회자된다고 하니 이야말로 기쁜 소식이다.
학자들의 연구보다 일반인들이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것은 이들의 DNA이다. 태국에 살고 있는 먀오족의 후손인 라후족을 검사한 결과 이들은 인류학적으로 한국인의 특징인 유전자 백혈구 항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시장천호묘채西江千戶苗寨
황하와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하다가 가장 많은 먀오족이 정착한 곳이 시장西江인데 이 지역에는 난화춘과 랑더 등 먀오족 마을들이 많다. 그중 가장 많은 먀오족이 사는 시장천호묘채는 먀오족의 성산인 레이궁산 기슭에 위치하며 마을 인구 중 먀오족의 비율이 99.5퍼센트에 이른다고 한다.
마을 입장료는 100원, 표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이어진 산자락에 빼곡하게 들어선 가옥이다. 대부분 2층에서 3층으로 이루어진 적각루吊脚樓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 만들어진 몸체에 기와를 얹어 만든 집이다. 산속으로 쫓겨 다닌 오랜 시간 동안 터득한, 경사가 있는 산비탈에 지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조다.
헉헉거리며 가파른 산꼭대기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마을을 바라보니 전망 하나는 끝내준다. 맞은편 산자락에 빼곡하게 들어앉은 적각루들도, 학교도, 공연장도, 마을의 중앙을 감아 흐르는 강물도, 물가에서 뭔가를 씻고 있는 아낙네도, 강물 위에 가볍게 걸터앉은 멋진 풍우교도 보이니 그야말로 신선이 따로 없다.
하지만 감상적인 생각도 잠시, 이 곳 또한 나무를 끼어 맞춘 적각루여서 발을 뗄 때마다 삐그덕삐그덕, 아! 미친 몸무게, 그냥 날아다니고 싶다. 게다가 옆방의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소리는 물론 옆방의 숨소리까지 다 들린다.
점심을 먹을까 하고 길거리 음식을 기웃거리니, 우리가 먹는 인절미 같은 것도 있고 예쁘게 염색한 찹쌀밥을 지어서 판다. 내일 아침은 찹쌀밥으로 먹으면 될 것 같아서 내일 아침에 몇 시에 문을 여냐고 물으니 7시에 나온단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번쩍거리는 커다란 은장식의 목걸이와 화려한 꽃문양의 치마, 틀어 올린 머리에 장식을 하고 먀오족 아주머니들이 성장을 하고 마실을 간다. 마치 거리에 반짝이는 커다란 청금석이 움직이는 것처럼, 각각의 몸 전체를 흐르는 아우라 때문에 몽롱한 기분으로, 사진을 찍는 것은 그다음, 잠시 숨도 안 쉬고 쳐다봐야만 했다. 제대로 된 사진은 없고 남은 것은 그녀들의 자취 뿐이다.
마을로 오르다가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전망대로 오르는 전동차를 타는 곳이 나온다. 전동 차비는 편도 5원, 올라가면 전통복장을 빌려주는 곳이 있어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고, 어쨌든 천호묘채에 온 사람은 전망대로 다 모였다.
마을은 몇 개의 풍우교가 물길 위에 얹어있는데, 다리 위에는 관광객은 물론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든 말든 모란꽃을 예쁘게 머리에 장식한 아주머니들은 노래 연습을 하고, 아저씨들은 루성芦笙을 불면서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공연 연습에 한창이다.
농사를 짓든, 이제는 길 옆 가게에서 장사를 하든, 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짬을 내어 노래를 부르고, 루성을 연주하며 건강한 춤을 춘다. 달리 보면 멋진 인생이다.
이들이 나오는 공연은 하루에 두 번이 있는데 오전 11시 30분과 오후 8시에 있다. 오전 공연은 30분간 공연으로 마을 입장표가 있어야만 공연장에 들어갈 수가 있다.
오후 8시 공연은 V.I.P석은 15000원, A석은 12000원으로 공연으로 봤던 사람들은 강력 추천하는데, 오후 6시 공연인 줄 알고 표를 구입하고 나니 8시다. 저녁 약속시간이 겹쳐서 어쩔 수 없이 환불을 해 달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더니 고맙게도 환불을 해 준다. 8시에 시작한 공연은 밤 10시가 넘어가도 공연장은 소리와 빛으로 가득했다. 계절에 따라 시간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니 관심이 있으면 놓치지 않길 바란다.
날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오전 공연장은 넘치는 손님들로 북새통이다. 시간에 맞춰 들어가니 앞좌석은 없고 옆 좌석만 남아있는데 그나마 그늘이 내려 있는 곳을 앉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햇살이 좋은 날에는 해를 등지고 있는 자리가 좋으며 좋은 좌석을 앉으려면 좀 일찍 들어가는 것이 좋다.
먼저 화려한 복식이 눈을 끌고 공연의 수준도 나쁘지 않다. 청춘 남녀의 구애 장면, 손님에게 소뿔 잔에 술을 권하는 풍습, 루성연주와 전통음악 연주 등의 내용인데 오전 공연이나마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