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루 Nov 14. 2023

‘Roland Garros’,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

#  레위니옹 Réunion 1

부르봉섬 île Bourbon


타원형보다 더 둥근 형태의 레위니옹은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약 720킬로미터 동쪽에 있다. 제주도의 1.3배 크기이며 동쪽으로 175킬로미터를 두고 떨어져 있는 모리셔스와 함께 서인도양의 마스카렌 제도Mascarene Islands에 속해 있다. 그러다 보니 모리셔스와는 일치하는 역사가 많다. 무인도였던 인도양의 작은 섬 레위니옹은 1507년 포르투갈인이 발견했다. 이때까지도 레위니옹과 인도양의 섬들은 포르투갈의 무역선이 쉬어갈 수 있는 임시 기착지로만 사용했다. 포르투갈은 섬을 경영할 만한 인구가 부족했던 탓이기도 했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 등이 인도양에 진출한 후에 인도양과 카리브의 섬들은 사략선 해적들의 본거지나 은신처가 되었다. 사략선 해적이란 각국 정부가 인정한 해적으로 주로 다른 나라의 상선을 약탈하거나 필요에 따라서는 전투에도 참여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인도양의 섬들을 중간 기착지로 이용한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1642년 그때까지 그 누구도 종주권을 주장하지 않는 레위니옹을 비롯한 인도양의 섬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1646년에는 프랑스 해군이 레위니옹의 서부 도시 생폴 Saint-Paul로 진주하여 프랑스는 명실공히 레위니옹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하였다. 프랑스가 레위니옹 섬을 점령했을 때는 부르봉 왕조(루이 13세) 치하였으므로 부르봉섬 île Bourbon으로 불렀다. 1792년에 프랑스혁명세력은 구체제 Ancien Régime의 상징인 부르봉이란 이름을 레위니옹 Réunion으로 바꿨다. 섬 이름을 왜 변경했는지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지만 프랑스혁명 당시에 혁명을 주도한 마르세유와 파리 국가방위군의 회의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프랑스어 ‘La Réunion’은 회담이나 집회, 모임, 결합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프랑스의 정권이 변할 때마다 이름이 바뀌었던 섬은 1848년 프랑스 법령에 의해 레위니옹으로 정착되었다.  


제국 시절의 프랑스는 제국을 운영하는데 방해가 되는 식민지의 지도자와 반프랑스 독립운동가들을 레위니옹으로 유배시켰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마다가스카르 메리나 왕국의 마지막 여왕인 라나발로나 3세(재위 1883~1897)이다. 그녀를 레위니옹에 유배시켰다가 본국과 너무 가깝다고 생각했는지 마다가스카르와 멀리 떨어진 그들의 식민지 알제리로 다시 유배시켰다. 그녀는 1917년 알제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938년이 되어서야 본국으로 그녀의 유해가 이송되었다. 1916년에는 반프랑스 독립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타인타이(재위 1889~1907) 황제와 주이떤(1907~1916) 황제가 함께 레위니옹으로 유배되었다. 

Ranavalona III of Madagascar before 1900 /en.wikipedia.org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최대 식민지를 보유한 영국은 비교적 평화적으로 식민지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인도의 면직물로 인해 산업혁명을 이루었던 영국에 비해 자국의 식민지에서 얻은 것이 적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까, 프랑스는 식민지와의 전쟁을 불사하였다.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전쟁 범죄는 씻을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아직도 프랑스의 해외 영토는 여전히 많지만 대세를 따라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들은 하나 둘 독립해 나갔다. 인도계와 중국계 이주민, 크리올(백인과 마다가스카르와 동아프리카 이주민의 후손들), 그리고 소수의 백인으로 구성된 레위니옹으로서는 독립을 이루려는 의지와 동력이 부족했을까? 1946년 레위니옹은 인도양의 작은 섬 마요트와 함께 일찌감치 프랑스의 국외에 있는 주가 되었다. 레위니옹은 프랑스 국외 영토 중에서 인구((22년 기준, 약 87만여 명)가 가장 많다. 프랑스 해외 주가 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처지가 프랑스 본토인이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해외 주의 국민들은 때에 따라서는 폭력을 수반한 국가의 결정에 따라 이들의 운명이 결정되기도 한다.     

    

‘1965년 프랑스 정부는 본토의 지방 인구가 감소하자 해외 영토 중에서 인구가 많은 레위니옹의 아이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프랑스 정부는 가난한 레위니옹의 부모들에게는 집과 학교교육을 약속했으나 아이들은 크뢰즈 Creuse 지역의 중 상류층 가정의 하인이 되거나 농장에서 일했다. 그중에는 어린 나이에 고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정신병원에 억류된 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반바지에 슬리퍼만 신고 파리 오를리 공항에 도착한 아이였던 당시 피해자인 마샬(2002년 당시 55세)은 미성년자 납치 및 격리 등의 혐의로 국가를 고소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난 삶을 적은 책 <도둑맞은 아이들 Une Enfance Volee>을 출간했다.’ -2014년 2월 18일 자 한국일보 기사에서-     


당시에 이루어진 레위니옹 아이들의 생명과 인생을 담보로 한 프랑스 본토로의 이주 정책은 프랑스 정부에 의해 수년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인권유린은 당시 인구문제에 위기를 느낀 프랑스의 노동 인구 유입 정책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헬기 투어 중에 찍은 생 폴 지역의 풍경, 현재도 레위니옹의 인구밀도는 평지가 거의 없는 섬인데도 불구하고 프랑스 해외영토 중 최고이다.


프랑스테니스오픈과 ‘Roland Garros’   

   

강변과 골목길에 흩뿌려진 덩굴장미를 찾아다니는 5월 말이 되면 남편은 ‘Roland Garros’를 보기 위해 티브이 앞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곤 한다. 호주오픈, 윔블던, US오픈과 함께 4대 그랜드슬램 대회 중 하나인 프랑스 챔피언십 테니스 대회인 Roland Garros는 1891년에 시작했으니 무려 1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한다. Roland Garros의 상징은 앙투카(불에 구운 흙벽돌을 분쇄한 흙)로 만든 붉은 클레이 코트와 스페인 테니스 선수인 라파엘 나달이다. 테니스에 문외한인 나조차도 프랑스테니스오픈을 이야기하면 붉은 코트를 떠올리고 동시에 라파엘 나달 Rafael Nadal을 떠올리니 말이다. 나달은 Roland Garros에서 무려 14번의 타이틀을 획득했다.     


Roland Garros /en.wikipedia.org

 

그런데 프랑스테니스오픈을 상징하는 롤랑 가로스는 테니스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의 이름이다. 초기 항공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롤랑 가로스 Roland Garros(1888~1918) 1913년 최초로 비행기를 이용하여 지중해를 건넌 비행사였다. 그는 1903년 라이트형제가 동력을 이용한 최초의 비행기로 짧은 비행을 성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09년 처음 비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1910년에는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1913년 9월에는 역사상 최초로 지중해 횡단 비행(생 라파엘에서 튀니지의 비제르테까지 729km)에 성공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가로스는 프랑스 공군에 입대하여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그는 초기 공중전에서 전세를 바꾼 비행기의 인터럽터 기어 개발에도 공헌하였으며, 프로펠러 필드를 통한 발사 메커니즘을 개발하여 공중전에서 독일비행기를 파괴하였다. 1915년에는 비행 중에 독일군 비행기를 총으로 쏘아 격추시켰다. 이 모두가 전투기역사에서 최초의 사건이었다. 1915년 4월에는 공중전을 하다가 비행기에서 추락하여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3년 후 영화처럼 독일군으로 변장하여 포로수용소를 탈출했다. 군에 복귀한 가로스는 1918년 10월 5일 공중전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30세 생일 하루 전이었다.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이었다. 

롤랑 가로스의 비행기


롤랑 가로스 Roland Garros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서인도양의 레위니옹 섬에서 1888년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 공을 세운 프랑스의 전쟁 영웅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을 때까지 프랑스 식민지 태생이었다(레위니옹은 1946년 프랑스의 해외 영토로 편입됐다).


이미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청년은 매일 전투기에 오르며 죽는 순간을 상상했을 것이다. 죽는 순간 30세의 청년이 떠올린 찰나의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학교에 잘 다녀오라며 발코니에서 손을 흔들어주던 어머니의 미소였을까?, 눈앞에서 튀어 오르는 고래가 노니는 그리운 고향 레위니옹의 검푸른 바다였을 수도 있겠다.      

프랑스는 그의 용기와 업적을 기리고자 프랑스테니스챔피언십 이름에 그의 이름을 대신했다. 유로화를 사용하기 전에 사용한 프랑스 화폐인 10프랑짜리 동전에도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또한 그의 고향 레위니옹의 대문인 생드니 공항의 이름롤랑가로스 공항이다.


출국하던 날, 레위니옹 롤랑 가로스 공항의 새벽


이전 01화 글을 시작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