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가스카르에서 동쪽의 이웃섬 모리셔스를 경유하여 이른 아침 레위니옹으로 건너왔다. 지도에서 보면 수도 생 드니에 있는 롤랑가로스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남쪽의 생 피에르 Saint Pierre까지는 제주도 공항에서 서귀포를 가는 느낌과 비숫하다. 하지만 현지에서의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해변으로 나있는 약 210킬로미터에 달하는 일주도로는 해안에 위치한 도시들을 연결한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다 보니 오른쪽은 바다요 왼쪽은 절벽이거나 회색빛 구름들이 걸려있는 화산이다. 화산섬 기슭은 농지로 개간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주택들이 촘촘하게 앉아있다. 거칠고 남성적인 느낌의 멋진 산세가 보여주는 위용은 어디에서도 쉽게 보지 못한 풍광이다.
레위니옹은 섬 전체가 화산으로 이루어진 산악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인구밀도는 매우 높다. 섬에서 평지라고 볼 수 있는 곳은 해안가에 불과하다. 그래서 해안선의 평지는 섬의 순환도로와 연결되며 호텔과 관공서 등이 있는 도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22년 집계한 87만 명의 주민들은 대부분 산기슭이나 산속에 산다고 보면 된다. 물가가 높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역이건만 지역민들은 섬을 좀처럼 떠나지 않으며 외부인들은 물론 고향을 떠났던 이들까지 레위니옹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비교가 가능한 섬인 제주도는 레위니옹보다 조금 작으면서 가운데 한라산을 비롯한 중산간 지역을 제외하면 거의 평지인 셈이다. 제주도의 인구는 2023년 기준으로 약 67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레위니옹의 순환도로, 오른쪽은 바다요, 왼쪽은 화산이다. 생 드니 근처의 풍경이다.
레위니옹은 완벽한 화산섬이다. 아래 지도를 보면 북쪽(피통 데 네쥬)과 남쪽(피통 드 라 푸르네즈) 두 개의 화산군으로 이루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윗부분에 있는 피통 데 네쥬 화산은 섬의 3분의 2를 차지하며 휴화산이다. 동남쪽의 피통 드 라 푸르네즈는 레위니옹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언제든지 분출할 수 있는 매우 활발한 활화산이다. 프랑스 점령 이후 관측된 화산 분출은 지금까지 약 300회가 넘는다. 평균 1년에서 2년 사이에 한두 번은 분출한 횟수다.
레위니옹은 섬 전체가 거대한 산악군으로 이루어진 덕분에 근처에 있는 모리셔스와 세이셸이 해양 관광국으로 도약하는 중에도 레위니옹은 화산 트레킹의 성지 정도로만 머물러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레위니옹의 독특한 화산 풍광을 보기 위해 찾은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국적인 레위니옹의 모습을 눈에 담기도 바쁜데 공항에서 탄 택시요금은 멈출 줄을 모르고 올라간다. 레위니옹과 세이셸, 모리셔스는 차량 렌트비도 비싸지만 택시요금은 더욱 비싸다. 4일 동안만 머무는 단기여행인 데다 이틀은 투어를 신청했던 터라 차량 렌트를 접었다. 첫날부터 마주치는 레위니옹의 비싼 물가에 정신이 번쩍 든다. 나가는 날은 이른 새벽인데 택시비로 지불할 유로를 넉넉히 남겨놔야 했다.
여행에 앞서 철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때로는 여행의 즐거움을 반감시키기도 한다. 또한 현지투어는 미리 예약하는 것보다 현지에서 직접 하는 것이 더 저렴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떠나기 전 서울에서 피통 드라 푸르네즈 화산 투어를 신청했다. 괜히 예약했나 생각을 했지만 레위니옹에 가는 것은 화산을 보러 가는 것이어서 짧은 일정에 일이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는 잘한 일이 되었다. 막상 레위니옹에 도착하니 일요일이다. 레스토랑과 모든 투어 사무실은 문을 닫았으며 혹시나 했지만 전화도 안 받는다. 내심 오전에 도착하니 오후에 할 수 있는 반나절 투어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만약 예약을 안 했더라면 쉽지 않은 일정이 되었을 것이다.
11시경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짐은 맡겨놨다. 점심을 먹고 나면 방이 나올 것이었다. 호텔 주변 레스토랑을 알아보기 위해 구글검색을 해보니 걸어서 갈만한 곳에 타코나 샌드위치 등을 파는 가벼운 식당들이 문을 열었다. 로비를 나서는데 호텔 레스토랑에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북적인다. 시간을 보니 예배가 끝나는 시간이다. 높은 물가에 경계심을 갖고 있어서 1인당 런치 가격부터 알아봤다. 점심은 뷔페로 운영을 하는데 인당 42유로다. 음료까지 더하면 50유로가 넘어가는 경비다. 하지만 한눈에 훔쳐봐도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 각종 요리를 보고 나갈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점심부터 지출을 시원하게 해 버렸다. 다음에 이곳에 다시 온다면 들리고 싶을 만큼 생 피에르 해변 맛집 맞다.
할 말을 잊게 만드는 레위니옹의 남쪽 생 피에르 앞바다
이들의 이름 'Creole'
일요일 예배를 끝내고 점심을 먹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옷차림이 화려하면서도 클래식하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이들은 예배를 드리러 가는 날 마치 결혼식을 축하해 주러 가는 것처럼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고 간다. 크리올도, 흑인과 백인도 벽이 없어 보였다. 벽은 타인의 눈으로 이들을 애써 구분하는 내가 쌓은 것뿐이었다.
16세기 초에 포르투갈인이 발견한 레위니옹에 다수의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17세기 프랑스가 점령한 시점부터였다.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커피 경작에 조건이 좋은 화산섬 레위니옹(당시에는 부르봉 섬)의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커피를 경작하기 시작했으며 설탕 생산을 위하여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특히 레위니옹의 바닐라는 유명하다.
커피나무의 생장과정
잘 익어가는 커피콩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은 인도인도 있었지만 이웃 섬 마다가스카르와 동부아프리카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1848년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계약 노동 인력은 여전히 이웃인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 인도와 중국 등에서 데려왔다. 인도인과 중국인의 후손들이 많은 모리셔스와는 달리 레위니옹은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 백인과의 사이에서 나온 후손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을 크리올 Creole(또는 크레올)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는 전통음식을 크리올 음식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크리올은 대다수 레위니옹 사람들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생 피에르에서는 얼굴색이 밝은 크리올이 제법 많아 보였는데 생 뢰에서 만난 주민들은 대부분 얼굴색이 더 검은 크리올이었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영국과 미국 등 식민지 제국마다 생겨난 크리올의 의미는 같지만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조금씩 달랐다. 다행히 프랑스어권의 크리올인 레위니옹과 세이셸, 모리셔스 등은 다른 언어권처럼 크리올이 지나친 차별은 받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선주민이 없었던 지역에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등지에서 데려온 노예들이 이주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크리올은 백인(프랑스계) 아버지와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현재 주민의 50퍼센트는 크리올이며 인도계가 1/4 가량을 차지한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백인들도 있지만 이후에 이주한 백인들도 많아 백인들의 비율도 약 25퍼센트에 가깝다. 모리셔스에 비해 중국인의 비율은 매우 적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