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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Sep 17. 2020

[칼럼] 어떻게 살아도 인생은 제로섬

그날 밤, 설핏 잠이 드는데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어. 가뭄에 말라버린 실개천? 꼭지가 덜 잠긴 수돗물? 뭐지, 탁하고 힘없이 낙하하는 물소리는. 끊일 듯 이어지던 소리가 멈추자 쏴아아 하고 물 내리는 소리가 이어졌지. 이웃남자 오줌 누는 소리였어.


위층일까 그 위층일까 아니, 옆집일지도 모르지. 그날 이후 나는 한밤중 들려오는 오줌발의 노예가 되고 말았어. 남자인 걸 어떻게 특정하느냐고? 낙하 위치가 다르잖아. 종종 앉아서 볼일 보는 지인도 봤지만 이 낙수의 시발점은 무릎보다 한참 상위였어. 전립선 쪽에 묵직한 고민을 안고 있을 확률도 커보였지. 매일 밤 수차례 ‘누고 내리는’ 약약강강 물소리에 잠을 설치다보면 원치 않는 정보를 다수 파악하게 돼. 


고심 끝에 침대 위치를 바꾸기로 했지. 내가 원하는 시간에 위치변경을 실행해줄 사람으로는 이삿짐센터 직원이거나 시간이 남아도는 가족 또는 지인, 그도 아니면 이웃에 대한 불필요하고도 자세한 정보를 나눠야 하는 경비아저씨 등이 후보에 올랐어. 


그런데 남의 손을 빌고 싶지 않은 거야. 급기야 내 마음은 이웃이 자기 몸에서 한 방울도 내보내지 못한 채 애꿎은 물내림 버튼만 누르고 침대로 돌아갈 때 잠귀가 예민해 밤잠을 설친 게 그의 탓은 아니지 않느냐, 여럿 불러가매 떠들썩하게 침대를 옮길 필요가 있느냐, 라는 궤변을 만들어내고 있었어. 자사 퀸사이즈 제품 중 가장 묵직하고 정교하게 짜인 원목이라는 매장 직원의 설명이 떠올랐지만 떨쳐버렸지. 나는 혼자 해내기로 마음먹은 거야.   


결국 침대는 내가 원하던 자리로 옮겨졌어. 메트리스와 프레임을 분리하고, 없는 힘을 끌어 쓰느라 꼬박 하루가 걸렸는데 자리를 잡고 나니 처음부터 이 자리가 맞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웠어. 행복감이 심장을 뚫고 터져 나온 것도 잠시, 허리에 격렬한 통증과 함께 주저앉고 말았지. 


아파트 배수관 문제점을 알고 난 뒤 밤중에 요의가 느껴지면 거실 화장실을 써온 점잖고 품위 있는 이웃인 나는 당분간 욱신거리는 허리를 끌고 거실로 나가야할까, 아니면 안방 화장실을 통해 아랫집 이웃들에게 나의 청아한 오줌발을 공유해야할까. 확실히 위치를 바꾼 뒤로 배수관의 데시벨은 대폭 줄었어. 누수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대신 삐끗한 허리통증으로 당분간 밤잠을 설칠 예정인 나, 인생은 어떻게 살아도 제로섬. 


https://www.news1.kr/articles/?4062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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