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아침 너의 옹송그린 모습을 보고야 가을이 온 것을 알았어. 매미와 귀뚜라미가 바통 터치하고, 맞바람이 소슬하게 태를 바꾸고, 반소매 아래 맨살을 감싸게 되는 저녁나절에도 공기가 바뀌었다는 정서적 감도만 있을 뿐 체감은 지난여름 속에 있었지. 그러다 너를 본 거야. 너는 제 존재를 스스로 지워가는 그림자처럼 희미한 여름 속에 오도카니 있더라.
그러고 보니 다행이야, 지난여름이라고 적을 수 있어서. 내 기억 속에 가장 여름답지 않은 여름이었어. 눈부신 햇살 속에 풍요를 약속하는 릴케(‘가을날’)의 여름, 연인의 마음처럼 영원하길 바라는 세익스피어(‘소네트 18번’)의 여름, 청포도 익어가는 이육사(‘청포도’)의 여름까지는 바라지 않았어도 ‘일탈=반역’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무참한 여름이라니.
부직포 씌우개를 씌워 너를 다용도실 구석에 두려니,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있었던지 바닥에 동그란 자국이 새겨있더라. 에어컨을 견디지 못하는 나에게 너는 대체불가한 존재감으로 내 여름의 공백을 메워줬어. 매트블랙이니 실버화이트니 요즘 선풍기들의 ‘때깔’과는 비교도 안 되게 촌스럽고 에어컨·제습기·공기청정기의 스마트함과는 거리가 먼 네가 말이지.
요란한 비가 이어지던 밤이면 세 살 박이 코골이처럼 낮고 활기찬 네 날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단다. 너의 엔진은 불면의 밤으로부터 나를 지켜내 줬어. 일상은 흔들림 없이 나를 지켜줄 거라는 위로 같았지.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로 거실에 누워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네가 이마에 엉겨 붙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떼어주면 또 슬슬 잠이 왔어.
유리컵에 얼음을 가득 담아 베란다에서 책이나 노트북에 눈을 박을 때 네 날개소리에 얼음이 녹는 순간의 충만감이란! 제습기로도 해결되지 않는 습기 때문에 온 집안이 쩔쩔 맬 때 네가 목을 길게 빼고 강풍을 쏘아주면 어느새 빨래는 마르고 바닥은 보송보송해졌어.
올 여름이 모종의 경고라면 어쩌면 내년에는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여름일지도 몰라. 너의 다섯 날개의 자장가로도 잠들 수 없는 밤이 오면, 젖은 머리의 낮잠과 주말오후 베란다를 즐길 수 없게 되면 조선 순조 때 아끼는 바늘을 잃은 유씨부인의 ‘조침문’처럼 이 글을 되새겨 너를 보내마. 내 생애 가장 낯설고 끔찍했던 여름을 그나마 버티어낼 수 있었던 건 너의 노고 덕이었다는 것, 이상기후의 경고장이 쌓일수록 익숙하고 평화로운 너의 노래가 그리워질 거라는 것. 하여 낡고 오래된 나의 선풍기야, 모년모월모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가 재회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