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할머니의 육아, 할머니의 인생
"너 어렸을 때 못 해봐서 아쉬웠던 거, 그거 전부 다시 해보려고 어릴 적의 네가 모아나로 다시 태어났나 보다"
미국에 와서 아이가 이것저것 즐겁게 배우고 노는 것을 영상 통화와 사진으로 보면서 친정 엄마가 행복함과 애틋함이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뭘 그렇게 못 해봐서 아쉬웠다고.
서른.
어릴 때는 서른이라는 나이가 어른의 기준이었다.
서른 정도 되면 완전한 어른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서른여섯이나 되었어도, 아직 어른이라는 생각이 별로 안 든다.
마흔 정도는 돼야 어른인가 하고 있다.
알고 보니 너무 어린 나이 서른.
서른에 우리 엄마는 아이 셋의 엄마가 되었다.
5살, 3살, 1살 아이 셋을 데리고 10년 연애 끝에 결혼한 아빠와 맞벌이를 하면서 셋방살이를 했다.
아이가 셋이나 되어도 친정과 시댁에서 누구 하나 아이 봐줄 사람이라곤 없었다.
엄마 말대로 비빌 언덕이 쥐뿔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이 말 뒤에는 항상 '숟가락 몽댕이'가 나온다. 숟가락 몽댕이 하나 누구한테 받은 적이 없다고)
일을 해서 돈은 벌어야 하고, 아이 봐줄 사람은 없고.
이대로 안 되겠다 싶었던 엄마는 살림집이 작게 딸려있는 가게를 얻어서 장사를 시작했다.
소품 인형 가게도 하고, 화장품 가게도 하고, 옷 가게도 했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항상 손님을 대하느라 바빴지만 그래도 언제나 내가 '엄마!' 부르면 돌아볼 수 있는, '내 곁에' 있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장사집이 하고 싶은 대로 문 닫고 그러면 망한다."
이번 주말에는 하루 쉬고 어디 좀 가자고 하면 엄마가 항상 하는 말이다.
장사하는 엄마에게는 주말이란 게 없어서, 주말에는 항상 직장생활을 하는 아빠와 함께 놀이공원 같은 곳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그때 주말이라고 해봤자 일요일 하루였지만.
초등학교 입학식 때도 아빠 혼자 왔다. 아빠는 엄마의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더 환하게 채워주고 싶어서 노력했다. 수많은 엄마들 속에 우뚝 솟아있는 아빠를 향해 나는 더 환하게 웃었다.
삼 남매의 장녀였던 나는 엄마가 못 와도 씩씩하게 뭐든 잘하고 동생들 잘 챙기는 게 엄마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런 걸 몰랐는데, 그게 바로 엄마가 말하는 미안한 부분이었나 보다.
엄마는 내가 못 해봐서 아쉬운 게 많았던 딸이었다고 하지만, 나는 사실 하고싶은 걸 많이 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말 한 날, 온 가족이 차에 타고 당장에 피아노를 사러 나갔다.
바이올린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엄마는 바이올린 선생님을 붙여 주었다. 내 친구 중에 가장 잘 사는 친구는 아파트 60평에 살았는데, 주변에 바이올린 개인 교습을 하는 아이는 그 아이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가게에 달린 작은 살림집에서 바이올린 개인 교습을 받았다.
그때는 잘 몰랐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나의 개인교습은 엄마의 취미생활이었고 엄마의 주말이었다. 엄마는 내 교습을 그 모든 것과 바꾼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배우고 즐거워하면 그걸 행복으로 알고 엄마는 일 년 중 하루도 가게 문을 닫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다니던 외고를 자퇴하고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다.
그 해에 호주로 떠났다. 하필이면 그때 우리 집 형편이 가장 어려웠다는 것도 나는 몰랐다.
이민가방을 몇 개나 싸서 새벽에 아빠와 공항버스를 타러 나섰다.
막상 떠나려니 불안해져서 흔들리는 내 눈빛을 살피던 엄마가 말했다.
오고 싶어지면, 언제든 집으로 와도 된다고. 괜찮다고.
나라면 "엄마 아빠가 힘들게 보내주는 거니까 열심히 해야 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살다 보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많이 배우고 행복하면, 그게 엄마가 행복한 거라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아이가 많이 배우고 즐거워해도,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는 것을.
미국에 와서 점점 더 빠르게 성장해 가는 아이를 보면서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내 육아에 비해 엄마의 육아가 얼마나 큰 무게였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영상통화를 하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연거푸 하고 손녀의 사랑스러움에 취해서 말한다.
"우리 모아나 정말 뭐가 되려나 너무 기대된다"
여기까지는 우리 어머님과 같은데, 한마디 덧붙인다.
"우리 모아나, 엄마 말 잘 들어야 해. 엄마 안 힘들게~~!"
손녀딸 잘 크는 건 행복한데 잘 키우느라 고생하는 내 딸은 안쓰러운 것이다.
이제 늙어서 거울 보기 싫다는 엄마에게 나는 피부과에 다니라고 요즘 시술이 얼마나 좋냐고 핀잔을 준다.
"그러게 애초에 애를 왜 셋씩이나 낳아서 그 고생을 해"
내가 말하면 엄마는 갑자기 멋쩍어진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도 있어야지. 누구 하나 없었다고 생각해 봐, 안 되지... 어디 하나 버릴 구석 없이 다 이쁜 내 새끼들."
엄마는 오늘도 그렇게 다시 태어나도 고생할 소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