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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균 미국변호사 Jul 20. 2021

자격증과 창의성

나는 자격증형 인간인가

코로나로 업무가 한가해지고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에는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다. 어떻게 보면 최근에 취득했던 자금세탁 방지 전문가 자격증(CAMS) 공부도 시간적 여유, 학문적 호기심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고민을 잠시나마 식히기 위한 도피처(?)가 아니었나 싶다. CAMS 취득도 잠시, 나의 이 끝없는 호기심병(!)은 CIPP라는 개인정보보호 전문가 자격증으로 눈을 돌렸고, 얼마 전부터 책을 구매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꽤 많은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요즘은 웬만한 노력과 시간만 투자하면 취득 못할 자격증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학위나 업계 경력이 문제 되는 경우만 아니라면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누구나 따던 워드 1급, 사범대 졸업으로 취득한 영어 정교사 2급 자격증, 뉴욕/DC/버지니아 주 미국 변호사 자격증, 미국 테니스 지도자 자격증(USPTA), CPR 자격증, CAMS 자격증 등 나름 특이한 자격증 포트톨 리오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왠지 자격증이라는 것이 익숙하게 편안하게 다가온다. 지원 자격, 절차, 시험 자료, 시험 등이 전부 표준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방향대로만 쭉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필요한 절차를 딱딱 밟고 나면, 양질의 소고기에 선명하게 찍힌 파란색 도장 같은, 멋진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 마치 게임에서 내가 레벨업을 하거나 혹은 새로운 스킬을 얻을 것과 같은 기분이다.


...


최근에 Adam Grant의 Originals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워낙 유명한 책이어서 몇 년 전에 읽으려고 사놓고 잊고 있었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서 읽게 된 것이다. 아직 초반부라서 전체적인 감상에 대해서 얘기하기에는 이르지만, 그중에 기억나는 내용이 있었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창의력과 창의적인 인재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의외로 어렸을 적부터 뛰어난 두뇌로 재능을 보인 사람들의 상당수가 성인이 되어서는 창의력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업무나 직업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려서부터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피아노 신동은 기존에 작곡된 노래를 더 아름답고 정교하게 연주하는 연주자로 성장하는 경우가 더 흔하며,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이 명곡을 작곡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


생각해보면, 자격증이라는 것은 창의성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위치한 개념이다. 이미 누군가가 고르고 고른, 어떤 업무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의 정수를 익히고, 이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일종의 사회적 시그널이기 때문에 창의성은 오히려 지양된다. 사실 전문직으로 대표되는 의사나 변호사가 하는 일은 창의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동안 축적되고 발달된 지식을 정확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인출하여 적용하는 능력이 중요한 직업들이다. (물론 이 과정도 어느 정도 창의력이 들어간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창의력과는 거리가 좀 있다)


사실 내가 법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한 렌즈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자연에는 뉴턴의 열역학 법칙 같은 자연법칙이 존재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는 법이라는 합의된 규칙이 존재하고 이를 아는 것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법은 사회의 설명서 같은 존재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가전제품을 구매하고 설명서를 제대로 읽어보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필자는 어떤 제품을 사든 설명서를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는 본다)


즉, 변호사가 하는 업무의 대부분 의뢰인에게 "제가 설명서를 자세히 읽어봤고, 설명서의 해석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봤을 때, 이 세탁기는 기울어진 곳에 설치하면 안 됩니다"라는 종류의 조언을 주는 것과 크게 다른 바가 없다. 그것이 인수합병이든 특허소송이든 어쨌든 정해진 규칙과 룰이 있고, 그 룰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없는지, 혹은 그 중간에 위치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해석하는 일이 주이기 때문이다.


...


결국, 자격증을 좋아하고, 이에 편안함을 느끼는 나는 창의성이 부족한 것으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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