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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균 미국변호사 Jul 29. 2021

수백 명의 범죄자를 석방하더라도 인디언과 약속을 지켜라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 McGirt v. Oklahoma

Neil Gorsuch 미 연방대법관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처음 발견할 당시 미국 본토에는 이미 원주민(Native American)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미 연방 의회가 1830년 원주민 이주 법으로 인디언들을 강제로 이주하고 박해한 사건 뒤(일명 “눈물의 길” - Trail of Tears), 결국 1833년 오클라호마 지역에 살고 있던 인디언 크리크 부족(Creek Nation)과 조약을 맺음으로써 인디언의 자치 구역과 영토를 인정했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편, 미국 연방 형사법 Major Crimes Act of 1885 에는, “인디언 영토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인디언은 미 연방배타적 관할권에 따라 처벌받는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크리크 부족이 속해 있는 오클라호마 주에서는 주 검경이 인디언 영토에서 벌어진 범죄를 수사 및 처벌하기 시작했고, 그런 관행이 오랫동안 계속되어왔다.


이 판결문의 주인공인 McGirt는 오클라호마 주 법원에서 4살 난 손녀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죄로 무기징역과 동시에 500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변호인단은 그가 “범죄를 저질렀던 당시 인디언 부족의 일원이며, 해당 범죄가 인디언 자치구역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오클라호마 주 법원의 유죄 판결은 애초에 원칙적으로 효력이 없고 재판은 연방법원에서 다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의 사건은 항소와 상고를 거듭하여, 결국 미 연방대법원에서 심리가 이루어지게 된다. 여기에서 오클라호마 주를 대표한 주 법무장관은 “의회가 최초에 인디언 부족에게 조약으로써 자치 정부 및 영토를 허락한 것은 맞지만, 이후 인디언들의 자치령을 공동생활 구역(communal)으로부터 개인 할당(allotment) 체제로 전환하면서 실질적으로 인디언 보호구역의 폐지를 불러일으켰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수의견을 집필한 닐 고서치(Neil Gorsuch) 대법관은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연방법 어디에도 인디언이 '기존에 조약으로부터 수여받은 권한이나 영토를 포기한다'라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인디언의 형사 처벌 권한은 연방 정부의 배타적 권한이다”라고 반박했다. 참고로 닐 고서치 법관은 원래 예전에 타계한 전 스칼리아(Scalia) 대법관의 승계 후보로 트럼프가 지명한 법관으로,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판결문에서는 나머지 4명의 진보 성향 법관들과 의견을 같이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그의 선택이 이해가 갈 수도 있는 게 그는 스칼리아 법관처럼 지독한 텍스트 중심 주의자(textualist)이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 중심주의의 반대되는 개념이 의도 중심주의(intentionalism)이다. 의도 중심주의에서는 법이 제정된 당시의 의도나 쟁점, 사회 상황 등을 고려해서 법 조항을 유연하게 해석하려 하지만, 텍스트 중심주의는 이러한 외부적인 요소를 배제한 순수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법을 해석하는 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닐 고서치 법관에게는 “그동안 역사적으로 혹은 관습적으로 이렇게 해왔다” 라든지 혹은 “만약 법을 이렇게 해석하면 이런 부정적 결과가 발생할 것이다”라는 등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약속은 약속이다”라는 것이다.


결국 연방대법원은 McGirt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에 따라 그동안 오클라호마 주 법원에서 인디언 범죄자를 대상으로 한 유죄 판결은 모두 취소되었다. 이는 오클라호마 주의 113년 역사만에 처음 있는 일이며, 동시에 수백 명의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가 연방법원에서 다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는 아주 오래된 사건으로 담당 경찰관이나 증인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고,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진술을 제대로 하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버지니아 지역 연방 국선변호인 사무실과 연계되어 있어서, 관련 사건의 대리 협조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워낙 큰 사안이다 보니 전국의 연방 검찰청, 국선 변호인 사무실에서 오클라호마 지역에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그 내용에 따르면, 해당 연방대법원 판결이 있은 후 올해 봄까지 약 560건이 넘는 유죄 판결 취소 사건들이 연방법원으로 이관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러한 사건들은 대부분 심각한 중범죄인 살인, 강간, 강도 등 폭력 범죄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언 사회에서는 해당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오래전 조상들이 박해받은 끝에 연방 의회가 조약으로 자치 구역을 인정해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이 실질적으로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연방대법원이 이번에 판결문으로서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준 셈이기 때문이다. 


수백 명의 흉악 범죄자를 풀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법의 원칙에 입각하여 100년 전 인디언들과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트럼프가 지명한 보수성향 대법관이 4명의 진보적 대법관과 의견을 같이해 다수 의견을 구성한 판결문. 이것이 바로 미국의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진정한 법관의 독립성결단력의 산물이 아닌가 싶다.


판결문 원본 링크 McGirt v. Oklah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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