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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YTRUE Aug 02. 2018

기억

함께 밤을 지내고 난 쌀쌀한 가을 아침이었다. 나는 꽤 두툼한 남방의 소매를 걷어올리며 언덕을 내려왔다. 내가 잠시 뒤를 돌아봤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다 민망해하며 몸의 방향을 틀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나의 입가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일을 하다가 잠시 쉬러 밖에 나가려고 일어나며 뒤를 돌아봤다. 그가 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놀라며 자리를 옮기는 그의 모습에 그날도 내 입가엔 웃음기가 마르지 않았다.

회식이 있던 날, 그와 나는 다른 테이블에 앉았고 나는 동료 몇 명과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우리끼리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중에 내 옆 동료에게 전화가 왔다. 그 사람이었다. 스피커폰으로 받고 있는 줄 모르는 혀가 꼬인 그는 인사도 안 하는 사이인 내 이름을 계속해서 불러댔다. 내 입가에 번지던 웃음이 사라지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 날 후로 그는 내게 이것저것 물건을 빌려대며 조금씩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때 너무 가까워진 거다.


내가 할머니 댁에 두 달 동안 살게 되면서, 둘 사이는 이상해져버렸다. 가까우면서 가깝지 않은, 멀다고 말할 수 없는. 그 후로 몇 달 동안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었고, 나도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마주 앉아 소주를 먹으면서도 우리는 어떤 대화도 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 꽤 오랜 기간 지속이 됐고 서로의 감정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찰나의 그날 밤,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났다. 그 후부터 나는 일을 제대로 다니지 못할 정도로 정말 정말 아팠다. 그 후로 한동안 그는 내게, 나는 그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결국 우리 각자의 연애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색한 대화를 시작으로 다시 가까워진 우리는 아슬아슬한 자존심 싸움을 끝내지 못했다. 7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 관계를 정리할 만한 말을 찾지 못했다. 회사 사람들이 그토록 수군대던 우리 사이가, 정작 우리에겐 아무 이야기거리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보고싶다고 울다 지쳐 핸드폰을 들어다보면 그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런 모습들을 그가 상상이나 할까?

지지난 여름 다시 만났을 때, 여전히 우리는 제자리였다. 그때 그가 말했다. S에게 연락해 보라고. 우리가 이어질 수 없는 이유를 그때 확실히 절감했다. 내가 S를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는 걸 그는 모르고 있었다.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내 손등을 덮던 손을 모른체하지 않고 잡았더라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한편으로는 모른체했던 것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이익도 주지 못하는 관계니까.

가느다랗게 이어지고 있는 이 줄을 이제는 내가 먼저 끊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7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마음을 주는 척 주지 않고, 마음을 주지 않는 척 하면서 온마음을 빼앗겨 버리곤 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아직도 서로에 대해 아는 척 하지만,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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