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운 Jan 10. 2018

널 위해서 라는 거짓말

나이와 외로움의 관계에 대한 단상

#221
동생아, 어쩌면 널 위해서만 얘기하는거라는 얘기는 거짓말인지도 모르겠다.
순수하게 널 걱정해서 준비했던 말이고 쏟아냈던 말이지만,
그렇게까지 강하게 얘기하고 극단적으로 얘기한건

단지 니가 과거의 방황하던 내모습을 닮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내모습도 일부 가지고있기 때문일거다.

이제 부모님께서 잔소리하시고 참견하시는 걸 이해하고 포용해야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은
몇 해전에 깨달았던건 사실이지만,
나도 그렇게 인식만 했을뿐 여전히 완벽하게 실천하진 못하고 있다.
내가 이젠 부모님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지지자가 되고 받침대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렸을적엔 징징댈 수 없었던 상황들때문에, 지금은 웬만큼 머리가 커져서 징징댈 수 없는 이유때문에

어리광을 부리고 부모님의 따뜻한 말한마디에 괜스레 틱틱대고 싶은것도 여전하다.

의방시절 선임이 9개월만에 제대하면서 1년 넘게 혼자 내무실에서 생활할때,
주말에 아무도 출근을 안하고 방을 찾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말을 단 한마디도 못하게 되는 날이 종종 있었다.
에너지가 있는 날은 잠깐 외출을 하거나 전화해서 실컷 떠들 수 있었지만 몸이 피곤하고 무기력한 날엔 그런것 조차 귀찮아서 이불덥고 쳐박혀 컴퓨터만 보거나 의미없이 티비만 보기 일쑤였다.
대화상대없이 몇번을 그렇게 있다보니 사람이 정말 미칠수도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말할대상이 그리고 리액션 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게됐다.

그런 경험을 내 특수한 군생활에 한정시키곤 했는데
나이를 한살두살먹어가면서 점점 맘을 터놓고 얘기할수 있는 사람들이 바빠지거나 줄어들고
그렇게 속편하게 있는얘기, 없는얘기 다 할수 있는 기회나 상대가 점점 없어진다는 걸 알게되면서
인연에 대해, 특히나 모든 걸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생각을 점점 하게되었다.

가끔씩 세상에 내가 혼자라고 느껴질 때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의심하게 되었고
그럴때마다 어떻게든 의미있게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싶었는데,
그때의 나는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게 도움이 됐다.

간단하지만 내 얘기를 주의깊게 들어주는 사실만으로도 해결될 때가 많았다.

동시에 나야 그렇게 쉽게 찾아갈 사람들이 아직은 많지만,
할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부모님 역시 그런 대화상대가 점점 줄어간다는 걸 조금씩 알게됐다.

내 잘못을 지적하고 혼내고 잔소리하는 걸로
그렇게 엄마로서 아빠로서의 존재가치를 자각하려는 시도들을 나는 항상 귀찮게 생각했고

뜬금없이 방문열고 찾아오시는 걸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고만 생각했다.
괜히 방문 한번열고 뭐하는지 궁금해하시면서 한번 웃고 돌아가시는 할아버지 모습도 싱겁다고만 생각했다.
어쩌다 말한마디 걸면 십분넘게 이어지는 대화가 의미없다 생각하고 다른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진정 대화라고 할만한 걸 한번도 못하는 날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할아버지를 위해 하루에 한번은 집이 편안한 감옥처럼 느껴지지않게 해야하는
책임과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됐다.
적어도 하루에 한번은 영양가없는 대화라도 말동무를 해드리는게

내겐 지루한 한시간일지 몰라도, 당신께는 사고하며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시간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먼저 찾아가 어리광도 부리고 팔베개도 하면서 같이 있다보니
내가 얼마나 가족에 대해 무신경하고 무감각하게 살았는지를 반성하게 됐다.

부모님과는 그렇게 편하게 대화하는게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자기앞가림도 못하는 아들이었기에
무조건 아직 어리다는 전제를 깔고 얘기하셨기에
서로 솔직히 얘기하게 되기까지 제대하고부터 몇년이 걸렸는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트러블도 많았고 정말 많이 부딪혔지만
내가 한번 접고 억지로라도 이해해드리는 스킬도 필요하다는 걸 알게됐다.
동등한위치에서 날선 토론을 하는게 아니라
친구가 내게 고민을 얘기할때 그저 들어주고 받아줄 수 있는 것처럼
부모님께도 이제 그런 사람이 필요한 시기가 점점오고있고
그 대상이 나 라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단지 듣는척 끄덕이고 리액션을 해드리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그런이야기까지 들을 여유가 있어야 하고
그런 수준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내 앞가림을 잘하는게 필요하다는 것까지 말이다.

할수 있을 때, 언제고 볼 수 있을때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란 얘기하지말고
지금 당장 할수있는걸 해드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립의 막바지에 와서야 알게된 게 아쉽긴하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게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나보다는 좀더 일찍 알았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다.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일상이 얼마 남지않았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받은만큼 좀더 많이 돌려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6 저급한 욕망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