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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Apr 23. 2023

옥상

우리 집에는 천국의 계단이 있다. 베란다 한 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철제 계단, 이라기보다 사다리를 그렇게 부른다. 계단이 거의 수직이라 내려오다가 손쉽게 주님 곁으로 갈 수 있다. 자칫 잘하면 목숨을 보전하기도 한다. 상시 오르내리기보다 비상시 오르내리는 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나는 옥상에 대한 낭만이 있기 때문에 날이 좋으면 자꾸 올라가고 싶어진다. 이미 옥상에서 쓸 캠핑용 의자도 구매했다.



주말 오전, 날이 좋아 옥상에서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가방에 캠핑용 의자, 커피가 든 텀블러, 책을 넣었다. 가방을 한 쪽 어깨에 둘러 매고 사다리를 올랐다. 설상가상 옥상 문도 좁아서 혼자서 병목현상을 겪어야 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올라간 보람이 있게 하늘은 맑고 바람이 불었다. 해를 등지고 앉아 책을 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음 이거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집 남쪽으로 '깊은 수학 학원'이 있고 동쪽, 서쪽으로 빌라가 붙어 있다. 북쪽으로는 레미안, 자이, 아이파크가 순서대로 있어서 고개만 한 번 슥 돌리면 아파트 브랜드 3사를 두루 부러워할 수 있다.



서울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누가 칼 들고 쫓아오면 동쪽 빌라로 번쩍 뛰어 도망쳐야지 생각할 만큼 건물끼리 가깝다. 서쪽 빌라는 동쪽 빌라만큼 붙어 있진 않지만 스몰토크 정도는 가능할 만큼 가깝다. 서쪽 빌라 옥상에는 할머니가 자주 나와 앉아 계신다. 할머니의 아들 정도 돼보이는, 그러나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늙은, 아들이 종종 옥상에서 개를 산책시킨다. 내 위치에서는 아래 위로 송송 움직이는 개의 꼬리와 귀만 보인다. 개는 짖지 않는다. 서쪽 빌라 옥상에서는 닭을 키우는 것 같다. 속은 보이지 않지만 작은 닭장으로 추정되는 네모난 나무 틀이 있고, 닭 울음 소리가 종종 들리기 때문이다. 서쪽 빌라 옥상에서는 가끔 뭔가를 태우기도 한다. 아무래도 무슨 짓을 벌이는 게 분명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는데 동쪽 빌라에서 오래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동쪽 빌라 옥상에 누가 올라오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엔 젊은, 남자가 슬리퍼를 신고 한 손에 담배를 들고 걸어나왔다.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재빠르게 레미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가시거리로 보니 남자가 계속 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의자를 자연스럽게 돌려서 남자를 완전히 등지고 싶었다. 하지만 의자를 쿵기덕쿵덕 움직이느라 더 시선을 끌까봐 눈깔만 최대한 서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저기요."


? 난가? 날 부른 건가 지금? 나는 남자쪽을 쳐다봤다.


"가깝네요."


"... 그러네요."


"이사 오셨어요?"


"네."


"전에 살던 분들은 옥상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올라오는 계단이 가팔라서요."


남자는 대답 대신 담배 연기를 뱉었다. 나는 다시 책을 보는 척했다. 담배 냄새가 내쪽으로 날아왔다. 남자가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말했다.


"제가 옛날부터 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나는 말없이 남자를 쳐다봤다.


"같은 시간에 각자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면 어떨까요. 각자 집에서 먹는데 서로 두런두런 얘기도 할 수 있고. 상추 부족하면 서로 옥상으로 던져줄 수도 있고."


나는 이럴 때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고기 한 쌈 정도 들어갈 만큼 입을 벌리고 남자를 쳐다봤다.


"음.. 그럼... 깊은 수학 학원 학생들이 부러워 하겠죠."


남자는 고개를 돌려 깊은 수학 학원을 봤다.


"맞네요."


남자는 미세하게 웃었다. 그는 별다른 인사 없이 다시 오래된 문을 열고 왔던 곳으로 갔다.



깊은 수학 학원 학생들이 부러워 하겠죠... 왜 그 말이 떠올랐을까. 맞는 말을 한 걸까. 애초에 남자가 고기를 먹느니 하는 말을 했을 때부터 맞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긴 한데... 나는 책을 덮었다. 닭 울음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이상한 동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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