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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 O Jun 15. 2020

순수한 어른을 찾습니다

왜 갑자기 순수에 꽂혀서는..

‘순수’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꼭 손예진이 출연했던 포카리스웨트 광고가 떠오른다.

모두의 마음속에 순수라는 단어가 가진 이미지는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흰색과 파란색의 조합에,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밝은 날에, 흰 솜처럼 뽀얀 (그 당시의) 손예진이 짓는 미소는 때 하나 묻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올 법한 그런 순수함으로 인식된 듯하다.


그런 '순수'라는 단어에 갑자기 꽂혀서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다.




어린아이들의 ‘순수’와 어른들의 ‘순수’는 달랐다.


나면서부터 화목한 가정에서 충분한 사랑을 듬뿍 받고 잘 자라 모난 곳이 없고, 그 때문인지 누구를 미워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고 사람들은 순수하다고 한다. 그야말로 때가 묻지 않아서 순수한 상태의 아이니 순수한 것이다.


학창 시절에 순수하다는 말은 이렇게 쓰였다.

한참 성에 눈뜰 나이인 청소년들이 모이기만 하면 야한 얘기를 하게 되는 그런 나이 때,

남자애들이 그런 것들을 즐긴다는 걸 알 때마다 “변태”니 “진짜 싫다” 느니 눈살 찌푸리던 나와 내 친구들도

그러니까 남자애들뿐만 아니라 여자애들도 모이기만 하면 2~3시간 이어지는 수다가 결국은 야한 얘기로 정점을 찍고 나서야 끝나던 그 시절에

그런 이야기를 하면 눈을 멀뚱멀뚱하고선 ‘그게 뭐야?’라는 표정으로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놀라는 아이들을 보고 "아이고 우리 OO~, 순수하다 순수해!"


그러고 사회인이 되고 나서는 순수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그건 주위에 순수하다는 말을 들을 어른들이 별로 없어서 일 것이다. 사회인이 될 정도의 나이를 먹는 동안 떼 묻지 않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테니까.

아, 아주 간혹 회사에서도 순수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


“대리님, OO대리님 아세요? 저희 팀에 새로 왔는데.. 뭔가 심상치 않아요 느낌이..”


“아~ OO대리님 그 부서로 갔어요? 그분 순수한 분 이셔… 아주 밀크같이 순수한 분이지!”


며칠을 같이 일하다 보니 알았다고 한다. 순수하다길래 그저 나쁜 사람은 아니겠거니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동문서답 대왕에 학습과 피드백의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아주 백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 나에게 순수는 까만 눈동자에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은 손예진의 미소였는데 이제는 저 대리님이 순수다.



드라마 상류사회의 고두심이 던져준 새로운 어른들의 '순수'


넌 사랑이 흠집 없는 100% 순수성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나 본데,
계산으로 시작해서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순수하게 사랑이라고 한 시작이 계산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어.
순수하다는 거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게 아니라 온갖 잡탕을 정제하고 단련시켜서 순수성이 되는 거야.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건 순수가 아니라 순진한 거지.
순진한 건 이용당하고 버려지기 쉬워, 인생 공부했다고 쳐.


2015년 방영한 드라마 ‘상류사회’에서 재벌가문의 딸임에도 나름 ‘순수’한 캐릭터인 딸(유이 분)에게 엄마(고두심 분)가 하는 말이다.


대학생 시절, 실험실에서 혼합용액을 비커에 넣고 끓여서 혼합되어 있는 물질들을 각각 분리시키는 실험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섞여 있는 물질들은 각각 끓기 시작하는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온도를 서서히 올리면서 차례대로 끓어 나오는 아이들을 순서대로 모으면 순도가 100%인 순수한(섞이지 않은) 각각의 물질을 얻을 수 있다.


이거였다. 사회인이 되고 나서 순수한 어른의 얘기를 잘 듣지 못하는 이유.

이제 우리 어른들이 순수해지기 위해서는 온갖 잡탕에서 뒹굴다가 불순물을 정제하고 단련시켜 순수성을 회복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그러니까 어른들은 온갖 떼를 묻히고 있는 중이거나 아니면 묻힌 떼를 정제하고 단련시키고 있는 중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善)과 순수


순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나니, 무의식적으로 내가 추구하고 있는 ‘선(善)’과 ‘순수’가 닮은 것이 느껴졌다. 비슷한 시기에 읽은 주광첸의 책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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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최고의 선’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이상주의의 극단을 달렸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주의의 극단을 달렸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희한하게도 의견이 일치했다.
 즉 ‘최고의 선’은 ‘목적이 없는 행위를 즐기는’것에 있다는 것이다.


‘목적이 없는 행위를 즐기는’ 것이 어째서 ‘최고의 선’이라 말할 수 있는가?


서양철학자들은 신은 정령이며 신의 행위는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는 절대적인 자유 행위라고 여겼다.
반면 인간은 육체적인 한계로 결코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육체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할수록 신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
목적이 없는 행위를 즐기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유 행위다.
따라서 목적이 없는 행위를 즐기는 것이 최고의 이상이 된 것이다.


저자 주광첸은 이와 같이 말하며 "목적이 없는 행위를 즐길 때 사람은 신처럼 자유롭고 부유하다"라고 했다.


내가 무의식 중에 선을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주광첸이 말한 것처럼 꼭 신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목적은 아니더라도 내가 추구하는 ‘선’은 내게 있어서는 ‘자유’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하고 있었다.


니체가 말하는 순수한 어린아이


니체는 인간 정신의 단계를 말하길.

낙타(주어진 책임을 묵묵히 따르는 상태)에서 사자(기존의 질서에 맞서 저항하는 투쟁 상태)의 단계를 거치고 다음으로 궁극의 단계인 순수한 ‘어린아이’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순수한 어린아이의 상태란, 어린아이가 놀이를 할 때 온전히 집중하여 순수한 창조를 해나가는 상태이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힘을 지닌 순수한 상태이다. 이 궁극의 ‘어린아이’ 상태와 불순물을 정제해낸 ‘순수’의 상태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까. 그러고 보니, 니체가 말하는 ‘어린아이’ 상태는 낙타와 사자의 단계를 힘겹게 돌파한 힘을 가진 어린아이 이므로 갓 태어나 세상 험함을 겪지 않은 진짜 ‘어린아이’ 와는 다른 아이라는 점에서, 떼를 정제한 ‘순수’가  걸은 궤도와도 비슷하다.


오래전 친구의 물음에 늦은 답을 하자면


“살면서 고통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지 않아?”

그때 내 생각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잠시 “음…” 하다가 “언젠가 피하지 못하는 고통이 왔을 때 그걸 이겨내려면 그 전의 고통들로 단련을 해 놔야 하지 않을까?” 그러고는 다시 친구의 말도 맞는 듯하여 “그래도 뭐.. 계속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좋겠지? 힘드니까”라는 맥락의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내 첫마디의 근거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니체의 명언 “피할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였다.

그때 친구와 나는 둘 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끄덕임을 주고받은 걸로 기억한다. 우린 그때 사활을 건 시험을 준비하느라 인생의 고통을 피하느냐 마느냐 따위의 고민을 할 여유는 없었으므로.


그때와 똑같이 니체의 말을 근거 삼아 근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스스로에게 답해본다.


결국 피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내가 추구하는 선, 즉 '자유로운 아이의 순수함'을 회복하기 위해 기꺼이 겪는 고통도 있길 바란다.


마무리를 짓다 보니 얼마 전 뵈었던 삼촌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걸 피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 사람들은 습관이 돼서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피하는 길을 택하지. 반대로 정면돌파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어. 어떤 선택을 하면서 살 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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