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는 거들뿐...
2017... 21권
2018... 27권
2019... 27권
2020... 19권
2021... 18권
2022... 07권
2023... 16권 + α
수년째 쓰고 있는 독서노트를 펼쳐 넘겨본다. 그리고 나름의 통계를 내 본다. 이상한 일이다. 늘 바빠서, 시간이 부족해서 책을 못 읽는다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난 COVID-19 이후로 개인적으로는 가장 시간이 풍족한 시기에 책을 못 읽었다, 아니 안 읽었다. 결론적으로 내 경우에 일이 없을 때 책을 못(안) 읽었다.
어쩌면 독서는 어린 시절부터 늘 아킬레스건이었다.
가난했던 아버지는 생의 대부분을 주말부부로 떠도셨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1, 2학년 즈음, 얼마 안 되는 한집살이 시절. 늦은 퇴근길, 아버지 손에는 거의 매일 책 2권씩이 들려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당시 꽤 유행하던 청소년 문학시리즈였던 거 같다. 아버진 당신이 어릴 적 책을 많이 안 읽어서 가난하게 산다고 생각하셨다. 형은 그 두 권을 다 읽고서야 잠자리에 들었고, 난 책 읽는 게 별로였다. 책은 형을 점점 더 유식하게(?) 만들어갔다. 장학퀴즈를 보면서 출연자보다 문제를 먼저 맞히고, 시험공부를 열심히 한 거 같지 않은데 늘 백점을 맞아왔다.(결국엔 이런 가시적인 성과도 열매를 맺진 못했지만) 난 그런 형이 부러웠고, 그 비결에 방대한 독서량에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싫었다. 활자가. 책이.
형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 나도 공부는 곧잘 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많이 아는 척하고 싶었다. 아는 척!
'아는'과 '척' 사이의 간극은 얍삽한 방법으로 메꿀 수 있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나오는 요약본이나 평론으로 난 가성비 높은 아는 척을 할 수 있었다. 책을 통째로 읽는 건 내겐 일종의 낭비처럼 느껴졌다.
사이비 독서가의 범죄행각(?)은 그 후로도 발각되지 않고 지속되었다. 난 짧은 글을 통해 남의 지식을 내 것 인양 '아는 척'하고 살았다. 꽤 박식한 녀석으로.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때는 고등학교 3학년, 난 신갈에 위치한 경찰대학교 건물 한편에서 면접관에게 취조(?)를 받고 있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엄석대..." 그 뒤의 질문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 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였는지, "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가?"였는지.
질문의 결말이 기억에 없으니 내 답변을 기억할리 만무하다. 어버버 하며 임기응변으로 넘기긴 했지만, 등꼴이 오싹했던 느낌은 생생하다. (다행히 그날 면접과 이어진 체력검정은 통과했다. 그리고 불행히도 마지막 학력고사 성적이 나빠서 최종탈락했다.) 사전 제출한 자소서에 취미는 독서,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고 적었으니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작품에 대해 대강의 내용만 알고 있던 난, 그게 면접의 질문으로 돌아올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의 면접이 내겐 마치 취조처럼 느껴졌고, 이후로 난 깨끗하게 손을 씻기로 결심했다.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강박적으로 책을 읽으려 했다. '정치경제반'이라는 소모임에 들어, 칼 마르크스의 '유물론' 같이 이해도 안 되는 책들을 꾸역꾸역 넘겨보기도 했고, 교범 볼 시간도 없었던 군생활 동안에도 '콜린파월 자서전' 같은 군인이 쓴 책을, 전역 후엔 영업과 관련된 책을 사들이고 읽어댔다. 이런 독서습관은 일단 책을 사두고 읽지 못하는, 즉 독서량이 도서의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는 기현상까지 초래했다. 몇 번의 이사와 때마다의 고민 끝에 책장과 책을 버리고 난 태블릿으로 e-book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에 알게 된 독서법 관련 서적을 구매하고 얻은 독서노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성취감(책장에 책이 쌓이지 않아도 되는)으로 내 독서량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독서의 이유가 사라졌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못하던 난 이런저런 상황이 겹치면서 하던 일을 그만둬야 했다.(사실 실적저하가 주된 이유였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 독서와 운동량을 늘려야 한다고 다짐했다. 체력과 책과 시간은 풍족했다. 독서량은 줄었다. 문학작품을 읽기엔 너무 한가해 보였고(정신은 한가하지 않았다), 직업적 커리어와 관련된 자기 계발서는 정할 길이 없었다.(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으니...) 책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왜 책을 읽으려 하는가? 도대체 왜!! 누칼협
다시 독서를 시작한다. 다시 살아갈 삶의 방법에 도움을 줄 자기 계발서 한 권, 파는 일에 참고할 만한 트렌드 관련 한 권, 산티아고 순례 관련 한 권으로. 그리고 오래전 태블릿 '내 서재'에 쟁여둔 세계문학 200권을 천천히 읽어갈 생각이다. 이제 '아는 척'이 아닌, 진심 어린 대화와 사심 없는 공유를 위한 독서를 해야겠다. 그래서 조금 더 따듯한 사람, 조금 더 재미있는 사람, 조금 더 정의롭고 상식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읽을만한 책 한 권 남기고 싶다. 책이 도와줄 거라 믿는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