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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다시 06화

#헌혈

#허삼관매혈기 #2am #이노래

by 정썰

안녕하세요~ 아침 식사는 하셨나요? 잠은 충분히 주무셨어요? 61번째.... 아, 헌혈하신 지 일 년이 넘으셨네요?


성안길 헌혈의 집. 오랜만이다. 문 열자마자 찾아갔는데 벌써 몇 분이 대기 중이다.

능숙하게 대기표를 뽑고, 겉옷을 벗어 보관함에 넣고, 신분증을 한 손에 들고 물 한 잔을 마신다. 띵동!

간호사님의 상냥한 인사에 답하고 신분증을 건네고 혈압계로 몸을 돌려 오른팔을 터널 안으로 밀어 넣는다.

자연스럽다. 몸이 기억하는 거다.

혈압이 찍힌 영수증(?)을 건넨다. 혈압수치는 좋으세요. 다행이다.

혈액형 검사할게요. 사실 난 이때가 가장 긴장된다. 헌혈 과정 중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

내가 내민 왼손 약지와 모니터를 번갈아 보던 간호사분의 눈이 조금 커진 듯했다.

헌혈의 종류는 크게 전혈과 성분헌혈로 나뉘고, 전혈은 8주에 한 번, 성분헌혈은 2주에 한 번 가능하다. O형의 경우 늘 피가 모자라다는 편이라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가까운 헌혈의 집을 찾았다. 그러니 앞에 앉은 간호사분도 낯이 익었고, 그분도 마치 두어 달 전에 본 거 같은 느낌으로 대화를 이어가다 살짝 당황한 거 같다.

1년 6개월 정도의 공백.


팔을 걷고, 바늘을 꽂고, 주먹을 쥐락펴락하면 끝나는 단순한 과정은 그 시작까지가 제법 까다롭다.

지금은 쓰윽쓰윽 넘기는 문진표의 질문들도 처음에는 '이래도 할 거야?'라는 집요한 회유처럼 느껴졌다.

헌혈 주기가 가까워지거나 문자로 S.O.S. 가 오면, 일단 스케줄에 포함시키고 전 날은 물론 당일 음주도 안된다. 앞서 말한 대로 충분한 잠과 식사가 필요하고 특정지역 여행도 불가 사유가 된다. 말라리아 위험지역에 근무할 동안도, 동남아시아 쪽 여행, 눈썹 문신 후에도 얼마간 헌혈을 할 수 없었다. 겨울철에 즐겨하는 반신욕도, 달리기를 포함한 과한 운동도 그날은 안된다. 하지만, 이런 굵직굵직한(?) 이유로 거절당하는 경우보다 체력적,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상이 가장 긴 공백의 이유였다. 피를 나눈다는 건 내가 건강하고 충분히 쉬고 있다는 자신감이 없이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본격적인 헌혈의 시작은 전역 후 새로운 직장에서 '조혈모세포'기증 캠페인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다. 그때까지만 해도 '골수'라는 이름으로, 뼈를 갉아내는 무서운 느낌으로 다가왔던, 그래서 나와는 상관없는 아니, 상관없어야만 하는 일이 소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행위로 다가왔다. 물론 0.005%의 일치확률이지만 건강한 몸뚱이 하나로 가능하다니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확률 높은 기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증 예비자 등록 후 그 확률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헌혈을 택했다. 줄 수 있는 게 이 혈액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이거라도 꾸준하게 하자는 마음으로 주기적인 헌혈은 삶의 일부가 되었다.


부끄럽지만 헌혈하는 마음의 순도는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초반에는 내 기부의 순도가 꽤 높은 줄 알았다. 당연히 초코빵과 음료수를 먹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었고, 헌혈 후 고르는 기념품도 주면 좋고, 안 줘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은 기념품으로 기부권을 택했다. 최소한의 대가(?)마저 give up 하고 기부를 기부하는 진정한 flex. 그리고 아쉬워했다. 많이. 헌혈 후 기분전환으로 영화 한 편을 보거나 중고서점에서 책 한 권 사는데 보태는 소소한 즐거움은 일종의 리추얼(ritual)이 되어 결코 소소하지 않았다. 헌혈증을 비롯해서 내 방 벽에 세워진 헌혈 유공장(은장, 금장), 그리고 기념품들이 헌혈을 지속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무심한 척 기념품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올 때마다 '허삼관 매혈기'(위화가 쓴 중국 장편소설)의 주인공이 떠오른 것도.


61회 헌혈 후 받은 도서상품권으로 가까운 중고서점에서 책 한 권 사서 돌아왔다.(영화예매권을 받아 영화 한 편 보고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먹지 않고 들고 온 이온음료와 초코빵은 아들 녀석의 간식거리로 유용했다. 녀석은 이제껏 세 번의 헌혈을 했고, 두 번째부터는 기부권을 선택하고 있다. (기특한 녀석. 네가 그러면 난 뭐가 되니...)


헌혈은 69세까지 가능하다. 주변에는 300회 넘게 헌혈을 하신 분도 있고, 100회 헌혈자가 생각보다 많다. 난 100회가 목표다. 이변이 없는 한 가능하다. 목표를 향해 남은 시간도 몸관리에 신경 쓰고 양질의 피를 만들어야지. 아들 시험이 끝나면 함께 헌혈의 집을 찾기로 약속했다. 부자가 나란히 누워 주먹을 쥐락펴락하는 장면을 생각하니 벌써 뿌듯하다. 한 가지 걱정은... 이 녀석이 또 기부권을 선택하면 어쩌지? 그날은 나도 쿨하게 기부권을 사용해야겠다. 아직 못 읽은 책도 꽤 남았고, 봐야 할 영화도 다 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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