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다시 08화

#야구

#최강야구 #최강몬스터즈 #7할 #국방부 #나이츠 #은퇴

by 정썰

골목야구로 데뷔했다. 야구장이 주변에 없었음은 물론, 포지션을 채워 세울 만큼 야구를 즐기는 친구들도 많지 않은 시골이었다. 골목이라는 구장의 특성상 공식 야구공이 아닌 오돌토돌한 실밥 모양이 찍힌 고무공이나 테니스공이 공인구였다. 빗맞은 공이 담을 넘어 가정집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했고, 글러브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투수는 맨손으로 공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시 빨간 실로 꿰맨 가죽공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귀해서였는지, 비싸서였는지, 둘 다였던 거 같다. 포수미트나 일루수 글러브는 야구공보다 더 귀했고, 야수 글러브도 내외 구분을 둘 수 없었다. 양 팀 글러브 수를 합치면 총 다섯 개 정도였다. 공수가 교대되면 일대일로 건네거나 자기 포지션에 벗어두고 가면 상대팀 선수가 썼다. 구장 폭이 좁아서 2루 베이스도 없애는 경우가 많았으니 3루타를 치는 일도, 도루를 허용하는 경우도 없었다. 베이스도 주로 전봇대나 출입문 기둥이었고, 심판도 없으니 서로 간의 합의 하에 볼과 스크라이크가 결정되었다. 프로야구가 개막되고 난 해태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에 가입해서 까만 점퍼와 모자를 즐겨 입고 썼다. 야구 붐이 일었고 야구를 즐기는 친구들도 드러났고, 점차 운동장으로 자리를 옮겨서 제법 야구처럼 야구를 했다. 내 포지션은 포수. 마스크와 보호장구, 글러브마저 멋져 보였다. 당연히 난 달랑 외야수 글러브 하나 달랑 들고 모자챙을 뒤로 돌려 쓰는 정도였지만. 바운드 볼 등 공을 좀 잘 잡아냈던 거 같다. 학년을 올라가면서 축구, 농구로 관심이 옮겨지면서 야구는 그냥 중계 보는 정도의 즐거움으로 만족했다. 가끔 학교 야구부원들이 방과 후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 하굣길에 잠시 발길을 멈추고 바라보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


뜻밖의 시기에 야구가 날 다시 찾아왔다. 위탁교육 시절 같은 연구실, 야구 마니아 공군 선배님이 국방부에 사회인 주말리그에 속한 ‘나이츠’라는 야구팀에 가입하자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어린 아들과 육아휴직 중이던 아내에게 통보에 가까운 양해를 구하고 주말마다 용산의 한 고등학교 야구장으로 향했다. 어릴 적 선망하던 정식? 유니폼과 야구와 그리고 지금도 운동가방에 잘 모셔져 있는 파란색 내야 글러브를 끼고 팀에 합류했다. 국방부 나이츠는 국방부 헌병들이 주축이었고, 계급은 대부분이 중사, 상사, 외국에서 자라 통역장교로 복무 중인 중위가 주전 투수를 하고 있었다. 선배는 소령, 난 대위였으니 팀 내 최상급자, 차상급자였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팀 연습은 함께 했지만 경기가 있을 땐 주로 더그아웃을 지켰다. 가문에 콩나듯한 출전기회는 팀이 크게 이기고 있거나, 크게 지고 있는 경기 후반에나 주어졌고, 난 유격수에 6~8번 타자 정도였다. 진짜 야구선수처럼 훈련을 하는 자체가 재미있었지만, 시합에 주전으로 서지 못하는 것은 못내 아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의 데스티니란 이런 것인가! 같은 군 소속인 계룡대 팀과의 원정 친선경기에서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주전 포수가 경기 시작 전 몸을 풀다가 햄스트링 경련 증상으로 뛸 수 없게 된 것이다. 경기 직전에다 팀에 포수 포지션은 그 중사 하나뿐이었다. 감독 겸 코치 역할을 하던 선출 상사가 난감한 표전으로 모여 서있던 팀원들 앞에 나서며 물었다. ‘혹시 포수 해본 분 없어요?’ 그때였다. 옆에 섰던 집단동기 선배가 고개를 내쪽으로 돌려 물었다. ‘너 어릴 적 포지션 포수였다고 했잖아.’ 서로의 야구부심을 뽐내며 나눴던 내 장황한 야구사 중에 ‘포수’라는 포지션을 선배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 꼬마시절 동네야구예요.’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배가 내 허리를 앞으로 밀어냈다. ‘정대위가 포수 했었데.’ 군인정신으로 경기에 임했다. 그냥 투수가 던진 공이나 뒤로 빠트리지 말자는 각오로. 그런데, 그.런.데. 난 그날 경기에서 사회인 야구에서는 흔치 않은 2루 도루 저지를 두 차례나 성공했고, 팀을 승리로 이끌면서(사실 이 표현은 좀 자기중심적이고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팀의 주전 포수로 말뚝을 박았다. 타격이 좀 약했는데 원포인트 레슨 등 선수출신 동료들에게 교정을 받아가며 좋아졌다. 결국 일 년여의 선수 생활은 그해 중앙행정기관 동아리 야구대회 4강이라는 감격스러운 성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최강 몬스터즈. 야구를 다시 할 순 없지만. 그간 차갑게 식어버린 야구에 대한 애정을, 실질적인 실직 이후 즐거울 일 없이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하던 일상의 한복판에 강속구로 꽂혀버린 최강야구(매주 월요일 밤에 방송되는 종편 예능프로)가 내게 던져준 화두. ‘다시’

왕년에 한가닥 하던 선수들이지만 은퇴 후 다시 그라운드에 올라, 현역 선수들(대부분 고등학생, 대학생 선수지만)과 당당히 맞선 팽팽한 경기들. 그리고 그 한 경기, 한 경기를 위해 다시 흘린 땀과 눈물. 너무 힘들고, 야구가 싫어서 그만뒀는데 자신이 사실 야구를 정말 좋하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고백이 멈춘 듯, 겨우 죽지만 않을 정도로 약하게 뛰던 내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 승리로 약속된 7할 승률을 드라마처럼 넘어서면서 난, 다음 시즌에도 야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막 야구에 눈을 뜬(?) 아들과 직관 약속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일상에 지쳐가면서 응원하는 팀도, 좋아하는 선수도 없었던 야구가, 50 분의 1 정도의 빛바랜 추억으로 사라졌을 야구가, 주말과 휴일에도 일을 하게 된 별 기대 없는 일상에 기다림의 설렘을 돌려주었고, 피곤한 몸에 링거 꽂 듯 마시던 씁쓸한 맥주 한 캔이 축배로 바뀌게 해 주었다. 다시, 저 선수들처럼, 난 내 삶을 좋아하고 있었구나. 먼지 쌓인 빨간 가방을 열어본다. 파란 내야수 글러브, 빨간 일루수 미트, 그리고 하얀 공. 난 내일도 나만의 그라운드로 뛰어나갈 거다. 그래 올 한 해 7할 승률 만들어보자. 야구처럼 삶도 알 수 없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keyword
이전 07화#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