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주 #우등생 #열등생 #문송합니다 #고학력_실업자
공부란 무엇인가? 검색창에 두 글자를 입력하니 그 아래 혹하는 연관검색어가 눈길을 잡아 끈다.
공부가 주(主)였다. 공부를 잘해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보다 공부를 잘하냐 못하냐가 문제의 중심이었다. 어릴 적부터. 멍청하게.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했다. 부모님 피셜에 따르면 다섯 살 때 천자문을 다 외었다니 천재는 아니어도 영재라 할만하지 않은가!(중학생 때 연탄가스를 마신 후로 범재로 돌아섰다고 믿고 있다.) 공부 좀 하니까 부모님은 물론이고 선생님들, 친구들까지 날 좋아했다. 줄곧 반장, 회장을 도맡아 했고 다른 분야를 조금만 잘해도 더 돋보였던 거 같다. 중학교 3학년 때 작은 시골학교지만 전교학생회장에(엄청 비민주적인 방식의 선출이었지만) 전교 1등(딱 한 번)까지 누렸으니 아! 옛날이여~.
그냥 공부를 해야만 했다. 학생이니까, 집이 가난했으니까, 타고난 머리는 나쁘지 않았으니까 사실 공부가 전부였다. 그래서 놓지 않았다. 놓치지 않으려고 비교적 열심히 했다. 과외 한 번(아 고3 때 수학과외 한 달, 돈 아까워) 받지 않고, 학원 한 번 가지 않고 노오력했다. 내 성적표는 한도가 넉넉한 신용카드 같았다.
처음으로 내려놓은 공부는 수학과목이었다. 고 1 때, 담임선생님은 박사학위까지 있는 수학쌤이었다. 학기 초 점심시간에 농구를 하다 교무실로 불려 가 견디기 힘든 모멸감을 느꼈다.(쓸데없는 짓 말고 밥만 먹고 공부하라며... 그는 내게 모욕감을 줬어.) 수학 시간에 자리를 뒤로 옮겨 다른 세계 친구들과 어울리며 딴짓을 했다. 처음엔 수학쌤이 싫었고, 그다음 해엔 수학이 싫어졌다. 독학으로 만회가 가능할 거라 자만했는데, 어려웠다. 그리고 수학 점수 때문에 그 다음다음 해엔 대학에 떨어졌다.
재수 끝에 선택한 대학과 학과는 점수에 맞춰서였다. 목표를 세우고 그에 맞게 공부했던 3년의 세월에 뒤통수를 강하게 맞고는, 딱히 목표가 없었다. 그냥 세상이 말하는 명문대에 가면 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무엇을 향한 공부는 두 번 정도밖에 없었다. 사회과학으로 분류되었지만 실질적 커리큘럼은 이과에 가까운 전공을 선택한 걸 알고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이건 운명이다'라고 합리화하며 직업군인으로 살아갈까 하며 학군단에서 2년간 군사학 공부를 병행했는데, 그마저도 쉽게 생각하고 열심히 하지 않았다.(내 군번은 97-14235다. 아는 사람은 안다. 아마 '풉'하고 뿜었을지도 모른다.) 유학을 가고 싶어서 점심시간 쪼개서 공부한 장교영어반은 지휘관이 허락하지 않아서 3분기 내내 시험조차 볼 수 없었고, 그 영어성적으로 석사 위탁교육에 지원했으니 유일한 결실이었다. 석사공부의 목적은 야전에서 마주친 오래된 군인들이 내 리더 역할 행위에 딴지를 걸어와 이를 반박할 이론적 토대가 필요해서였기 때문에 딱 그만큼만의 열정을 보인 거 같다. 이렇게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공부는 날 놔주지 않았다. 영업하다 만난 교수님의 도움으로 박사학위 코스까지 밟게 되었는데, 3학기 마치고 잠시 쉰다는 게 영영 끝나버렸다. 프로필에 '박사(Dr.)' 두 글자 올리려 했던 열심으로는 끝까지 가기가 어려웠던 거다.
여차저차 직장을 잃고 여기저기 취업을 알아보면서 아! '문송합니다.'가 이런 건가? 뼈저리게 느꼈다. 남의 일로만 생각했던 고학력 실업자라니. 닥치는 대로 해보았다. 그게 공부였다. 난 사회적 열등생이었고, 그에 걸맞은 일은 힘들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진정한 공부였다. 입으로만 나불대던 리더십, 팔로워십에 대한 깊은 성찰(물론 내 나름의 깊이다)과 그동안의 것과는 다른 결의 인내, 겸손, 자기 이해.
다시 공부하자. 껍데기가 아닌 온전한 나, 내 삶을 위해.
산티아고 순례를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관련 책을 찾아 읽는데, 몇 페이지 못 넘겨서 멍해지고 말았다.
-'카미노 걷기를 준비하면서 나는 삶의 매사에 있어 끝없는 준비의 유익과 보상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요긴한지 배웠다. 책을 쓸 때면 나는 원고 마감일을 지키려고 쩔쩔매느라 그만 내용을 하나로 모아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즐거움을 잊어버린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은 어린것들을 양육하고 보살피고 훈육하는 동안 아이들의 아름다움과 아이들로 인한 기쁨을 놓칠 수 있다. 학생은 성적과 과제물의 압박 때문에 정작 자신이 배우고 있는 훌륭한 내용은 딴전이 되기 쉽다. 사역자는 훈련 프로그램과 각종 집회의 끝없는 기회에 파묻혀 정작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놓친다. 경영자와 간부는 자신의 고된 일이 직원들의 삶에 가져다줄 변화를 보지 못한다.'(산티아고 가는 길 느긋하게 걸어라, 조이스럽, 복 있는 사람, P.53~54)
공부는 삶을, 또는 삶의 한 부분을 준비하는 과정이구나. 삶이 곧 시험이고, 시인의 표현처럼 나중에 소풍 마치고 돌아갈 때 내가 평가하면 되겠구나.
다시 공부가 주(主)가 된 삶을 살자.
주말엔 공부가주(孔府家酒) 한 잔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