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다시 13화

#소대장

#platoon #군대 #축구 #R.O.T.C.

by 정썰

재미없는 얘기를 하려고 한다. (특히, 독자가 여성이라면 넓은 아량으로 읽어 주시길. 무릎 꿇고 타이핑 중.)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


육사 제끼고, 경찰대 까이고, 결국 R.O.T.C.

직업군인에 관심을 보이자 당시 훈육관께서는 임관 전 병과 지원 시 1,2,3 지망 공란을 모두 '보병'으로 채우라 권유하셨다.(당시엔 제도적으로 가능했다.) 어차피 군생활 할 거면 장군 TO(Table of Organization)가 가장 많은 보병으로 승부를 보라는 배려(?)였다. 국방부 장관이 목표였으니(이 목표의 허접함에 대해선 '#목표'에서 할 말이 많을 거 같다.) 확률을 무시할 순 없었다. 결국 내 첫 보직은 4.2인치 소대장. 세 개의 지망 모두 보병이었고(사실, 대부분의 단기복무자들에게 보병은 비인기 병과라 세 번의 지망이라면 백퍼다.) 전공이 '통계'다 보니 수학, 아니 계산이 필요한 포병 성격이 강한 보직을 준 거다. 선발위원에겐 고민의 시간을 절약해 준 훌륭한(?) 자원이었을 거다.


보병부대의 박격포부대는 전투지원부대다. 보병이 적과 치고받을 때 옆에서 상대방에게 쨉 한방씩 날려주거나 돌멩이를 던져 맞히는 일을 한다. 일산 지역에서 한강 경계 임무를 맡던 연대(신촌 연대 아님 주의)의 전투지원중대 1 소대장이었던 난, 주기적으로 연대 예하 경계대대로 파견을 갔다. 사랑하는(짝사랑이었을지도) 소대원들과 K532라는 폼나는 궤도차량을 끌고.

대부분의 군인들이 그렇듯이 파견부대 대대장은(지금의 나보다 어리니 존칭은 생략하기로_논리적이진 않네) 축구광이었다. 얼굴이 조금 길었지만 그에 비례해 키도 크고, 미남이었다. 축구도 물론 잘했다.(나중에 장군도 되었다.)

수요일 전투체육의 날이었을 거다. 대대 간부팀과 우리 소대랑 시합을 제안했다. 사실 난 축구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소대원 중에 축구를 좋아하고 잘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고, 난 계급과 무관하게 실력 위주로 포지션을 정했다. 1년에 한 번 있는 연대 체육대회에서 연대장 오른팔격인 수색중대를 대표한 소대(소대장은 나랑 동기였는데 태권도 4단의 체육학과 출신이었다.)를 결승전에서 꺾고 우승한 경험이 있었다.(그 후로 사실 연대장은 왼손잡이였다는 풍문이...ㅋ) 대대장과 연병장(운동장의 다른 이름) 하프라인에 마주 섰다. 나를 내려다보던 대대장의 도발. '뭐 내기할까? 뭐 걸래?' 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뒤로 돌아 소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얘들아~ 소대장 월급 걸어도 돼지?'(와따 패기보소) 소대원들은 환호로 응답했고, 대대장은 씨익 웃으며 '돈은 좀 그렇고, 아이스크림 내기 하자'. '콜!!!!'

경기가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장은 소대장실 문을 빼꼼히 열더니 커다란 흰색 비닐봉지에 담긴 아이스크림 더미를(PX를 싹 털었나? 싶게 많았다.) 내 품에 던지듯 주고 사라졌다. 소대원들이 있는 내무실로 가져가서 아이스크림 파티를 열었다. 수많은 군시절 에피소드 중에 축구와 관련된 한 꼭지.


서론이 길었다. 난 지금 다시 소대장이다. 동기들은 대령, 대기업 임원, 중소기업 대표, 은행장 등등 연배에 맞는(?) 수식어를 하나씩 얻었는데, 난 소대장이다. 소대원도 두 명뿐이고, 변변한 무기도 없지만 소대장이다. 체감 급여와 사회적 직급이 회귀하니, 마음가짐도 그 시절로 돌아가야 할거 같다.(전자는 슬픈 일이고, 후자는 희망적인 일이다.)

소령 때 학군단 교관 보직을 받아 모교 학군단에서 2년 동안 12년 터울의 후배들을 가르쳤다. 리더십 석사 과정 위탁교육 직후라 후배들에게 리더십 관련 썰을 자주 풀었다. 그중 기억나는 한 대목.

군 조직에서 가장 뛰어난 리더십 역량이 필요한 직책은? 소.대.장. 이다. 중대장부터는 비교적 커다란 당근과 채찍을 손아귀에 들 수 있지만, 소대장은 없어. 그냥 나에 대한 신뢰와 전우애로 내 명령에 따라 적진에 뛰어들게 해야 해. 내 뒤를 따라, 죽을지도 모르는 방향으로 달려 나가게 해야 해. 솔선수범과 정성 어린 마음 밖에 줄 수 있는 게 없어. 그냥 너희들 존재만으로 감화시키고, 이해시켜야 해. 그래서 더 고민해야 하고, 더 강해야 하고, 더 정직해야 해.


통상 1~2년 소대장 역할을 수행한다. 급작스럽게 사단장 전속부관으로 보직이 옮겨지면서 1년도 못 채우고 소대장직을 마쳤다. 이취임식은커녕 소대원들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파견부대 막사에서 새벽에 소대원들 모르게 도망치 듯 나왔다. 미안해서. 그래도 짧지만 강렬했던 그 기간 동안 소대원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진심이었다. 그렇게 살아보자. 다시 소대장처럼.


후반전, 생의 하프라인에 몸집이 어마어마한 내일이라는 녀석과 마주 섰다. 또다시 도발. ‘넌 뭘 걸래?’ 뒤돌아 물어본다. ‘명! 현! 나 월급 걸어도 돼지?’

응?… 아!… 안된다고…. 알았어. 퇴근길에 아이스크림 사갈게.


keyword
이전 12화#노래